희성姬姓 채씨蔡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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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성씨

희성姬姓 채씨蔡氏

중국의 채씨(蔡氏)는 희성(姬姓)에서 파생된  성씨(氏)다.


주 문왕(周 文王) 서백 희姬 창昌

18명의 아들을 뒀고, 본처 태사(太姒) 형제는 10명,
1 백읍(伯邑) 고(考) : 상商나라 왕 제신(帝辛)이 문왕 희창을 유리에 있는 성에 가뒀을때 죽여 죽을 쒀 먹였다.
2 주周무왕(武王) 발(發) : 당, 진, 위, 한, 정, 공손, 석, 주나라가 망할 때  주周 씨로 바꿨다. 만주족에서도 주周 를 성씨로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유전자 검사가 필요하다.  

3 관숙(管叔) 선(鮮) : 관(管)
4 주공(周公) 단(旦) : 노(魯), 계손, 숙손, 맹손, 공(公)
5 채숙(蔡叔) 도(度) : 채(蔡)
6 조숙(曹叔) 진탁(振鐸) : 조(曹)
7 성숙(成叔) 무(武) : 성(成)
8 곽숙(霍叔) 처(處) : 곽(霍)
9 강숙(康叔) 봉(封) : 강(康) 위(卫=衞), 석石 冰 총 13성

10 담계(聃季) 재(載) : 심(沈)

모숙 정(叔 鄭)

곡숙(叔)

옹백(伯)

착숙 수(叔 繡)

필공 고(公 高) 필씨에서 위魏씨로 바뀜

원백(伯)

풍후(侯)

십팔남: 순백(伯)


희姬성姓 채蔡씨氏

채(蔡)씨는 주무왕의 동생 채숙에 연원을 두며 채(蔡) 나라에서 계출되었다. 발상지는 하남성 상채(上蔡)현이며, 세거지는 산동성 정도(定陶)현, 절강성 반안(磐安)현이다. 인물로는 중국 후한(後漢) 때 발명가 채륜(蔡倫, 50년 ~ 121년), 후한(後漢)의 문인 채옹(蔡邕, 132년 ~ 192년) 등이 있다.


채(蔡) 나라

성은 희(姬)이며, 작위는 후작이다. 수도는 상채(上蔡, 현재의 허난 성 주마뎬 시 상차이 현의 남서쪽)에 있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현재의 허난 성 상차이 현 일대를 영토로 했다. 이후 수도를 신채(新蔡, 현재의 허난 성 주마뎬 시 신차이 현)로 옮겼다. 주의 무왕이 친동생 채숙 도를 봉한 것이 그 시작이다. 기원전 531년, 초(楚)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기원전 529년, 초나라가 복국시켜 수도를 하채(下蔡, 현재의 안후이 성 화이난 시 펑타이 현)으로 옮겼다. 초나라 혜왕(惠王)의 명령을 받은 영윤(令尹) 자발(子發)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삼감의난 이후 채나라 위치삼감= 망한 상왕족 태자 무경을 감시하는 3명의 감시자 관숙 선, 채숙 도, 곽숙 처, 넷째 주공 단은 반란 평정후, 형인 셋째 관숙 선은 무경과 함께 처형했고, 동생들은 귀향 보냈다. 이후 채숙 도의 아들 채중(蔡仲) 호(胡)를 채나라에 분봉했다.



한국의 채씨(蔡氏)

채(蔡)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31,557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51위이다. 본관은 평강(平康), 인천(仁川), 광주(光州), 음성(陰城) 등 16본이 있다.

평강 채씨(平康 蔡氏)

후손들은 본관을 평강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평강채씨는 특히 조선조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는데, 그중 빼어난 인물은 정승 종린(宗璘)의 7대손 세영(世英)을 들 수 있다. 세영(世英)은 중종과 명종대에 걸쳐 호조판서, 좌참찬을 역임한 명신으로 일찍이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 사림(士林)들이 화를 입게 되자, 대궐에 들어가, 승지 김근사한테서 사필(史筆)을 빼앗아 들고 임금께 말하기를, "신은 간신이 아니고 제 소임 밖의 일을 말씀 드리는 것은 죄가 되오나, 이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는 것인지 죄명을 들고자 하나이다."  하고 말하니 좌우에 있던 관원(官員)들이 모두 겁을 내어 목을 움츠렀다고 한다.  특히 그는 벼슬에 있는 동안 기묘, 을사의 사화(士禍)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으나 홀로 남아 창안백발(昌顔白髮)이 조정에서 빛났으며, 평소 장중하여 아무도 그를 범하지 못했다고 하며 학문이 깊었고 천문, 의약에는 물론 중국어에까지 통달하여 크게 명성을 날렸다. 그외 철종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동건(東健)이 고종때 개성부 안무사를 거쳐 수군통제사와 형조 판서에 올랐으며, 동식(東軾)의 아들 광묵(光默)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홍성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아들 규대(奎大)와 함께 전사하였다.  영찬(永贊)은 최익현의 의병에 가담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경남 하동군 화개동에서 광양 의병장 백낙구(白樂九)와 합세하여 순천을 공격하다가 체포되어 고금도에 유배, 이듬해 다시 항일전을 전개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평강채씨 가문을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강채씨(平康蔡氏)는 남한에 총 14,326가구, 59,9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
충북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
전북 옥구군 성산면 도암리, 고봉리
함남 홍원군 삼호면 중평리
전북 옥구군 임피면 영창리
함북 경원군 용덕면 용향동
전북 부안군 주산면 동정리
함북 경원군 경원면 송천동
전남 보성군 복내면 용동리


위키 자료

시조 채송년(蔡松年)은 고려 고종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채송년의 묘는 강원도 평강군 유진면에 있다. 채송년의 장남 평강군(平康君) 채정(蔡楨)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차남 채자화(蔡子華)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르는 등 증손 대에 이르기까지 고려에서 8명의 정승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45명을 배출하였다.채제공(蔡濟恭)이 조선 정조조에 영의정에 올랐다. 2015년 인구는 84,877명이다.


인천 채씨(仁川 蔡氏)

시조始祖 채선무蔡先茂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없으므로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는 고려高麗 중기中期에 동지사同知事를 지내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유증遺贈되었다. 그는 인천仁川에 세거世居, 채씨일문蔡氏一門을 이루었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고려말에高麗末에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내다가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절개를 지켜 사문동社門洞으로 들어가 은거隱居한 채귀하蔡貴河를 중시조中로 하고 본관本貫을 인천仁川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인천 채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1명을 배출하였다. 14세손 채수(蔡壽, 1449년 ~ 1515년)가 1469년(예종 1)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충청도관찰사, 호조참판 등을 지내고 중종반정공신으로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었다. 2015년 인구는 43,387명이다.


광주 채씨(光州 蔡氏)

시조 채순희(蔡順禧)는 1187년(명종 17년) 조원정(曹元正)의 난이 일어나자 국왕을 호종하는 공을 세워 1197년(신종 즉위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고, 정2품 재상직인 평장사(平章事)까지 올랐다. 2000년 인구는 418명이다.일부에 알려지기로는 그의 선계는 중국 고신(高辛)씨의 아들 계(契)의 후손으로 기자(箕子)와 함께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그밖의 사항은 알 수 없다.
<本貫地>
광주(光州)는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로 지금의 광주(光州)직할시다.
주요성씨로는 蔡, 李, 金, 朴, 卓, 盧씨 등이 있었다.
1985년 현재 전체인구 47명


음성 채씨(陰城 蔡氏)

시조 채충(蔡冲)은 고려시대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고려 현종 때 채충순(蔡忠順)이 1027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오르고, 채정(蔡靖)은 1217년(고종 4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음성(陰城)은 본래 고구려의 잉홀현(仍忽縣)으로 지금의 충북 북서부에 위치한 군(郡)이다.
1985년 현재 전체인구 45명 2000년 인구는 248명이다.



관채세가(管蔡世家)-사기35-사마천
관숙(管叔)선(鮮)과 채숙(蔡叔) 도(度)의 집안 내력과 반란
관숙(管叔) 선(鮮)과 채숙(蔡叔) 탁(度)은 주(周)나라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들이다. 무왕과 어머니가 같은 형제는 10명이었다. 어머니 태사(太姒)는 문왕의 정비(正妃)였다. 맏아들이 백읍고(伯邑考)이고, 그 다음이 무왕 발, 그 다음이 관숙 선, 그 다음이 주공 단, 그 다음이 채숙 탁, 다음이 조숙(曹叔) 진탁(振鐸), 다음이 성숙(成叔) 무(武), 다음이 곽숙(霍叔) 처(處), 다음이 강숙(康叔) 봉(封), 다음이 염계(冉季) 재(載)였고, 염계 재가 막내였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 10명 가운데 오로지 발(發)과 단(旦) 둘만이 어질고 뛰어나서 문왕을 곁에서 보필하였기에 문왕은 맏아들인 백읍 희고를 버리고(상 제신이 문왕을 유리에 가뒀을 때, 장남을 죽여 죽을 쒀 먹이고, 무슨 성인이 사람을 먹느냐 놀렸다. 이것이 역성혁명 촉발시킨 가문의 원한), 희발을 태자로 삼았다. 문왕이 세상을 떠나고 발이 즉위하니 이가 무왕이다. 그때 당시에 백읍고는 앞서 일찍 죽었다.
무왕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물리치고 천하를 평정한 다음 공신과 동생들을 (제후로) 봉했다. 이에 따라 숙 선을 관(管)에, 숙 탁을 채(蔡)에 봉했다. 두 사람은 주왕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를 도우며 은나라의 유민들을 다스렸다. 노(魯)나라 지역에 분봉된 단(旦)은 후에 주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그가 바로 주공(周公)이다. 진탁은 조(曹)나라 지역을, 무는 성(成)나라 지역을, 거는 곽(霍)나라 지역을 각각 봉지로 받았으나, 봉과 재는 어렸던 관계로 봉지를 받지 못했다.
무왕이 세상을 떠난 뒤 성왕이 나이가 어려 주공 단이 왕실을 전담했다. 관숙과 채숙은 주공의 섭정이 성왕에게 이롭지 못하다고 의심하여 무경을 끼고 난을 일으켰다. 주공 단은 성왕의 명령을 받아 토벌에 나서 무경과 관숙을 죽이고, 채숙은 수레 10승과 시종 70명만 주어 내쫓았다. 그리고 은나라의 유민들을 둘로 나누었는데, 미자(微子) 계(啓)를 송(宋)나라에 봉하여 제사를 잇게 하고, 다른 하나는 강숙을 위(衛)나라의 국군에 봉하니 이가 위 강숙이다. 또 염계 재를 염(冉)나라에 봉했는데, 염계와 강숙이 선하게 행동하므로 주공은 강숙과 염계를 주 왕실의 사구(司寇)와 사공(司空)으로 삼아 성왕의 통치를 보좌하게 하니 모두 천하에 영광스러운 명성을 보였다.

채중(蔡仲)
채숙 탁이 멀리 쫓겨났다가, 죽었다. 그 아들을 호(胡)라 불렀는데, 호는 행실을 고쳐 덕을 닦으며, 착하게 행동했다. 주공이 그 이야기를 듣고 호를 노(魯)나라의 경사(卿士)로 추천하니 노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이에 주공은 성왕에게 아뢰어 호를 다시 채(蔡)에 봉하여 채숙의 제사를 받들게 하니 이가 채중(蔡仲)이다. (무왕의) 나머지 다섯 형제는 모두 봉국으로 가고 천자의 관리가 된 자는 없었다.

채백(蔡伯)
채중이 죽고 아들 채백(蔡伯) 황(荒)이 섰다.

궁후(宮侯)
채백 황이 죽고, 아들 궁후(宮侯)가 즉위했다.

여후(厲侯)
궁후가 죽고, 아들 여후(厲侯)가 즉위했다.

무후(武侯)
여후가 죽고, 아들 무후(武侯)가 즉위했다.
무후 때에 주나라 여왕(厲王)이 나라를 잃고 체(彘)나라로 달아났고, 공화정(共和政)이 시행되자 많은 제후가 주나라를 배반했다.

이후(夷侯)
무후가 죽고 아들 이후(夷侯)가 즉위했다.
이후 11년(기원전 827년)에 주나라 선왕(宣王)이 즉위했다.

희후(釐侯)
28년에 이후가 죽고, 아들 희후(釐侯) 소사(所事)가 즉위했다.
희후 39년(기원전 771년)에 주나라 유왕(幽王)이 견융(犬戎)한테 살해되고, 주나라 왕실은 쇠약해져 동쪽으로 (도읍을) 옮겼다.
진(秦)나라가 비로소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공후(共侯)
48년에 희후가 죽고, 아들 공후(共侯) 흥(興)이 즉위했다.
공후가 2년 만에 죽고, 아들 대후(戴侯)가 즉위했다.

선후(宣侯)
대후가 10년 만에 죽고, 아들 선후(宣侯) 조보(措父)가 즉위했다.
선후 28년에 노나라 은공(隱公)이 즉위했다.

환후(桓侯)
35년에 선후가 죽고, 아들 환후(桓侯) 봉인(封人)이 즉위했다.
환후 3년에 노나라가 그들의 국군 은공을 시해했다.

애후(哀侯)
20년에 환후가 죽고, 동생 애후(哀侯) 헌무(獻舞)가 즉위했다.
애후 11년에 당초 애후가 진후(陳侯)의 딸을 취해 아내로 삼고, 식후(息侯)도 진후의 딸을 취했다. 식(息) 부인이 시집을 가는 길에 채나라를 거쳤는데 채후(애후)가 예의 없이 대했다. 식후가 화가 나서 초나라 문왕에게 “우리를 정벌하러 오십시오. 제가 채나라에 구원을 청하면 채나라는 분명 달려올 것입니다. 그때 초나라가 채나라를 공격하면 성공합니다.”라고 했다.
초나라 문왕이 그 말을 따라 채나라 애후를 잡아 돌아갔다. 애후는 9년을 억류되어 있다가 초나라에서 죽었다. 그는 모두 20년 동안 재위하다 죽었다.

목후(繆侯)
채나라 사람들이 그 아들 힐(肹)을 세우니 이가 목후(繆侯)이다.
목후는 그 여동생을 제나라 환공(桓公)의 부인으로 보냈다.
18년에 제나라 환공과 채희(蔡姬, 목후의 여동생)가 뱃놀이를 했는데, 부인이 배를 흔들었다. 환공이 그만두라고 했지만 그만두지 않자, 환공이 화가 나서 그녀를 (채나라로) 돌려보내 버렸다. 그러나 (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채나라 목후는 성이 나서 여동생을 (다른 곳으로) 시집보냈다. 제나라 환공이 격노하여 채나라를 정벌했다. 채나라는 무너지고 목후는 포로로 잡혔다. (제나라는 다시) 남쪽 초나라의 소릉(邵陵)까지 쳐들어갔다. 얼마 후 제후들이 채나라를 위해 제나라에 사죄하자 환공은 채나라 목후를 돌려보냈다.

장후(莊侯)
29년에 목후가 죽고, 아들 장후(莊侯) 갑오(甲午)가 즉위했다.
장후 3년(기원전 643년)에 제나라 환공이 죽었다.
14년(기원전 632년)에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성복(城濮)에서 초나라를 물리쳤다.
20년에 초나라 태자 상신(商臣)이 그 아버지 성왕(成王)을 시해하고, 자리를 대신했다.
25년에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이 죽었다.
33년에 초나라 장왕(莊王)이 즉위했다.

문후(文侯)
34년에 장후가 죽고, 아들 문후(文侯) 신(申)이 즉위했다.
문후 14년에 초나라 장왕이 진(陳)을 토벌하여 하징서(夏徵舒)를 죽였다.
15년에 초나라가 정(鄭)나라를 포위하자, 정나라는 초나라에 항복했고, 초나라는 포위를 풀었다.

경후(景侯)
20년에 문후가 죽고, 아들 경후(景侯) 고(固)가 즉위했다.
경후 원년에 초나라 장왕이 죽었다.
49년에 경후는 태자 반(般)을 위해 초나라에서 부인을 얻어 주었다.

영후(靈侯)
경후가 (그 여자, 즉 며느리와) 간통하자 태자가 경후를 시해하고, 스스로 자리에 서니 이가 영후(靈侯)이다.
영후 2년에 초나라 공자 위(圍)가 그의 왕 겹오(郟敖)를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니 이가 영왕(靈王)이다.
9년(기원전 534년)에 진(陳)나라의 사도(司徒) 초(招)가 그의 군주 애공(哀公)을 시해했다. 초가 공자 기질(棄疾)을 보내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차지했다.
12년에 초나라 영왕은 영후가 그 아버지를 시해한 일로 영후를 신(申)으로 유인했다. 병사들을 숨겨놓고 영후에게 술을 마시게 한 다음 취하게 해서는 죽이고, 병사 70명도 함께 죽였다. 공자 기질에게 채나라를 포위하도록 명령했다. 11월에 채나라를 멸망시키고, 기질을 채공(蔡公)으로 삼았다.
초나라가 채나라를 멸망시킨 지 3년 만에 초나라의 공자 기질이 그 왕 영왕을 시해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평왕(平王)이다.

평후(平侯)
평왕은 채나라 경후의 어린 아들 려(盧)를 찾아내어, 세우니 이가 평후(平侯)이다. 그해 초나라 왕은 또 진(陳)나라를 다시 세웠다. 초나라 평왕이 즉위한 뒤 제후들과 가까이 지내려고 진나라와 채나라의 후손들을 다시 세운 것이다.

도후(悼侯)
평후는 재위 9년 만에 죽고, 영후 반의 손자 동국(東國)이 평후의 아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자리에 서니 이가 도후(悼侯)이다.
도후의 아버지는 은태자(隱太子) 우(友)라 불렸다. 은태자 우는 영후의 태자였는데 평후가 즉위하여 그를 죽였기 때문에 평후가 죽자, 은태자의 아들 동국이 평후의 아들을 공격하고, 그 뒤를 이어 도후가 된 것이다.

소후(昭侯)
도후는 3년 만에 죽고 동생 소후(昭侯) 신(申)이 즉위했다.
소후 10년에 초나라 소왕(昭王)에게 조회를 드리러 가면서, 멋진 가죽옷 두 벌을 가지고 가서는 한 벌은 소왕에게 바치고, 한 벌은 자기가 입었다. 초나라의 재상 자상(子常)이 그걸 갖고 싶어 했으나, 주지 않았다. 자상이 소후에 관해 험담을 하자 (소왕은 소후를) 초나라에 3년 동안 억류했다. 소후가 진상을 알고는 바로 가죽옷을 자상에게 바쳤다. 자상은 그 옷을 받고 소후를 돌려보내라고 말했다. 소후가 돌아와 진(晉)나라에 가서 함께 초나라를 정벌하자고 청했다.
13년 봄에 위(衛)나라 영공(靈王)과 소릉에서 회맹했다. 소후는 사사로이 주나라의 장홍(萇弘)에게 위나라보다 상석을 부탁했다. 위나라는 사추(史鰌)에게 강숙의 공을 내세워 결국 상석을 차지했다. 여름에 진(晉)나라를 위해 침(沈)나라를 멸망시키자, 초나라가 화가 나서 채나라를 공격했다. 채나라 소후는 아들을 인질로 오(吳)나라에 보내어 함께 초나라를 치자고 했다. 그해 겨울에 채나라는 오왕 합려(闔閭)와 함께 초나라를 격파하고 도읍인 영(郢)까지 들어갔다. 채나라는 자상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고, 자상은 두려워 정나라로 달아났다.
14년에 오나라가 떠나자 초나라 소왕은 나라를 회복했다.
16년에 초나라 영윤(자서)은 백성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채나라 정벌을 꾀했고, 채나라 소후는 두려웠다.
26년(기원전 493년)에 공자(孔子)가 채나라에 갔다. 초나라 소왕이 채나라를 토벌하려 하자, 채나라는 두려워 오나라에 급히 알렸다. 오나라는 채나라가 너무 멀기 때문에 (구하기 어렵다며) 도와주기 쉽게 도읍을 오나라와 가까운 곳으로 옮길 것을 약조하라고 했다. 소후가 사사로이 허락하고, 대부들과 논의하지 않았다. 오나라가 채나라를 구원하러 오자, 그 참에 주래(州來)로 도읍을 옮겨갔다.
28년에 소후가 오나라에 조회를 드리러 가려 하자, 대부들은 다시 도읍을 옮길까 두려워 리(利)라는 도적에게 소후를 죽이게 했다. 그런 다음 도적 리를 죽여 사건을 무마시키고, 소후의 아들 삭(朔)을 세우니 이가 성후(成侯)이다.

성후(成侯)
성후 4년(기원전 487년)에 송(宋)나라가 조(曹)나라를 멸망시켰다.
10년에 제(齊)나라의 전상(田常)이 국군 간공(簡公)을 시해했다.
13년에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멸망시켰다.

성후(聲侯)
19년에 성후가 죽고, 아들 성후(聲侯) 산(産)이 즉위했다.
성후가 재위 15년 만에 죽고, 아들 원후(元侯)가 즉위했다.
원후는 재위 6년 만에 죽고, 아들 채후(蔡侯) 제(齊)가 즉위했다.

제(齊)
채후 희제 4년(기원전 447년)에 초나라 혜왕(惠王)이 채나라를 멸망시키니, 채후 희제는 도망갔다. 채나라의 제사가 마침내 끊어졌다. 진(陳)나라 보다 33년 늦게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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