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姓氏=Y유전자=지역 이름=국가 이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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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성씨

성씨姓氏=Y유전자=지역 이름=국가 이름=역사

성씨姓氏는 Y유전자 혈족 문자로 표시하고, 나라가 새로 서거나 망할 때 성姓에서 씨氏로 바뀌며, 씨족, 국가 이름, 그들이 사는 지역에 이름 흔적을 지명으로 남깁니다. 동북 아시아에선 상형 문자 한자로 표시합니다.

 

성씨姓氏 한자 뜻을 한글로 풀어 설명하면, 아기를 낳아 안을 준비가 된 낭(娘)아가씨가 전(田)밭 갈 력(力)힘있는 남(男)사내로 부양(負良)할 능력 갖추고 지킬 랑(郞)사나이가 되면, 면(宀)집 밖 경쟁에서 백(白)엄지(俺指)손가락처럼 능력있는 인(人)사람 백(伯)맏이 면(宀)집 아내(安)편안히 아기 키우며 바깥 주인백(主人伯) 씨(氏)손 지아비(指丫丕) 선대조(先代祖)와 후세손(後世孫)을 함께 잇는 지(指)손가락 아(丫)들 지어미(指俺微), 성(姓)나라 곡식을 쌓고 사람이 모여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 운영(運營)하는 큰 지혜(知慧) 엄(俺)으로, 나라 돈을 미(微)작은 지식(知識)으로 운용(運用)쓰는 안주인(安主人)이, 자(子)아(丫)들을 생(生)낳으면, 성(姓)나라(囗)를 시작한 사(厶)나는 시(始)비로소 조(祖)조상이 됩니다. 태초에 나라를 세운 여신 마고(麻姑)는 그런 지혜로운 할(㿣), 성(姓)나라 운영 운용 백(白)경험 갈(曷)어찌해야 사람과 사람 사이,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손아귀(氏丫鬼) 나라 힘 발휘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선대조(先大祖) 경험을 후세손(後世孫) 나라로 잇는 줄기가 씨(氏)손아(丫)줄기, 나라 안밖 주인이자 부모인 수(手)손입니다. 지(指)손가락들을 아우(丫友)줄기가 같은 벗이라 하고, 네 아우들 합친 몫, 엄마처럼 지혜가 크고 뛰어난 능력 힘있는 백(白)엄지손가락은 엄마처럼 지혜가 크고 힘있는 뛰어난 능력있는 인(人)사람을 백(伯)맏이, 지아비로 우뚝 설 오라비(兀丫丕)나 누(啂)젖먹일 지어미가 될, 국(囗)나라 사람 사이 운영 인(儿)지혜로운 운영 부양(負良)지식 능력있는 사람 아형(丫兄)맏이를, 형 언니(焉妳), 오빠(兀䇑), 누나(啂我)라고 합니다. 나라를 부양(負良)하고 랑(郞)지키는 백(伯)맏이가 받쳐세운 기둥에 판을 올린 시(示)제단을 건(巾)천으로 덮고 죽은 부모 신위(神位)를 세운 제(帝)임금입니다.

 

성(姓)나라 그 자체를 말하고, 씨(氏)손은 나뭇잎사귀 아(丫)가장귀 줄기, 상하 좌우 혈통계보를 분류하는 기준으로, 나라 주인은 일부일처제에선 엎어치나 메치나 그게 그거지만, 모계 계승, 부계 계승 다르게 분류하는 이유는, 일부일처제가 아닌, 일처다부제, 일부다처제, 다처다부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모계 계승에선 아버지가 같은 자녀들이라 해도, 생(生)낳은 녀(女)어머니 성(姓)나라가 다르면 다른 나라 = 가족이기 때문에 혼인(婚姻)할 수 있는데, 부계 계승되던 조선왕조에선 말도 안되는 얘기가 됩니다. 서자가 분가 독립하면 새 성(姓)나라 백(伯)맏이가 되던 적,서 불평등이 없던 고대와 달리, 조선왕조는 분파(分派)로 구분 성씨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 성(姓)나라가 달라도 성씨(姓씨)가 같기 때문에 가족끼리 혼인하는 것이 되는 것이 중국에서 고려때 넘어온 부계 성씨 문화입니다.

 

성姓의 뜻을 윈도우10 한자 변환에서 검색하면, 여자 여로 나오는데, 한자를 한자로 설명한 것으로, 'recipe'를 한국어로 설명하는 것은 '레시피'가 아닌, '요리법' '비결' '처방'이고, '계집'은 욕이 아닌 그냥 한국어 입니다. 프랑스어 '마담 madame' 본래 뜻은, 엄마=결혼한 여자, 부인이란 뜻인데, 술집 여자들이 엄마 역할 하는 사람을 프랑스어 '마담'쓰면서, 좋지 않은 의미로 해석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순 한국어 '계집' 역시 사대주의 외국어 선호 생각에 의해서 욕으로 느끼게 됐습니다.

 

성姓은 여성을 의미하는 글자인데, 성씨姓氏 족보 문중, 왕실 역사에서 의미는 남자 Y 유전자 혈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글자로 쓰이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바뀌게 된 것일까요?

 

모계 혈족을 표시하는 성姓은, 사냥 채집해서 먹고 살며 이동하던 구석기 시대는 어머니 모계 중심으로 사회가 구성됐지만, 농작물을 경작해서 먹고사는 신석기 시대가 되면서 한 지역에 정착하게 됐고, 마을을 형성하면서, 농작물 보관하는 장소를 지키는 힘이 센 남자 중심으로 사회가 변하게 되면서, 전쟁에서 싸우는 것이 남자이므로, 자연스럽게 성姓은 남자 혈통을 표시하는 문자로 바뀌게 됐습니다.

 

따라서 정착하지 않고 이동하는 유목민들은 모계 성씨 계승 오래 유지됐고, 농경 정착한 정주민은 점령지역에 남자를 파견 다스리면서 부계 성씨 계승 자리잡게 됐는데, 변하지 않는 것은 지어미와 지아비 선대조 성(姓)나라와 후세손 성(姓)나라를 잇고 손 위, 아래 구분하는 씨수아(氏手丫)손아 역할과 뜻입니다.

 

농사로 곡식을 축척 하면서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힘센 호족은 본 처 외에 많은 후 처를 거느릴 수 있겠죠? 

 

시(媤)는 다른 성(姓)나라 가족과 혼인(婚姻)해서 큰 나라로 간, 우리 집에 달려있다 떨어진 딸, 다른 성(姓)나라 안주인(安主人)이 된 녀(女)여자는 전(田)밭 수확물을 나누는 심(心)마음을 다루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姓)나라 시조(始祖) 시어미(媤俺微) 안주인 주권 종부(宗婦)를 계승한 며느리 = 메나리는 종(宗)제사를 지내는 조상 제사 밥 = 메를 준비하는 나리 = 높은 사람이란 뜻이고, 안주인 주권을 넘겨준 시어머니는 할어미(㿣俺微)로, 먼저 성(姓)나라를 운영 운용했던 지식과 지혜 백(白)경험으로 갈(曷)어찌해야 할지 지식과 지혜를 조언하는 대가로 부양(負良)받는 손 위 선대조(先代祖)입니다. 안주인 주권 이양받는 존재는 제사를 준비하는 적(嫡)정실(正室) 안방 마(嬤)님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만질 수 있는 여러 처(妻)아내들 중에서 추(帚)비를 들고 청소하는 녀(女) 부(婦)아내가 성(姓)나라 안주인이 됩니다.

 

딸은 내 집에선 달려있다 떨어져 떠나서 다른 나라 주인 시조가 되는 존재로, 딸이 큰 나라로 가는 이유는 다른 가족과 합친 한가족이 되면서 나라 생존력 높이는 것이 정주민이 점령하는 부계 성씨 계승 방식이고, 이동하는 유목민은 원정 약탈 다니기 때문에 정주민 보단 딸을 큰 나라로 보낼 이유가 낮고, 약탈 원정에서 누가 살아돌아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라를 시작한 어머니 - 며느리 중심으로 나라가 단합 유지됩니다. 그 안주인을 가돈(家豚)이라 부르는데, 어머니를 집돼지라 불렀을까요? 시(豕)돼지 그 자체, 돈(豚)돼지는 붕(朋)벗+시(豕)돼지로, 돼지는 벗이란 뜻이 아닌, 패(貝)조개 별보배고둥 = 귀한 상품 화폐를 말하는 것이고, 가돈(家豚)은 나라 경제권을 갖고 있는 나라 중심점 안주인이란 뜻입니다. 고대 동아시아는 황하(黃河)이북 유목민들과 이남 농경 정착한 사람들이 패권 경쟁결과 주인과 노예가 됐습니다. 북방계통은 모계 어머니가 중심에 있고, 남방계통은 부계 아버지가 나라 계승 중심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본 처 큰아들 적장자 종손으로 아버지 권리를 계승했고, 화목한 후 처 자녀는 일가에 남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서자는 무리를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새 지역에 정착하면 그 지역 특성에 맞게 혈족 문자를 표시한 것이 소종 씨氏, 

상나라 족읍 족장들은 문자가 달라도 같은 혈통입니다.

 

성姓의 시작은 여자 여성 혈통인데, 남자 남성 혈통을 표시하는 문자로 쓰이고 있습니다.

 

신석기 시대부터 남자 부계 혈통 무리를 표시하는 성姓은, 그들이 정착한 지역을 표시하는 문자와 같은 뜻으로 쓰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성姓은 지역을 표시하는 문자로, 옛날 흔적은 지명에도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성姓, 글자 하나로, Y-DNA 부계 혈족, 그 혈족이 사는 지명, 애 많이 낳으면 힘센 씨, 되면 호걸 호豪 겨레 족族 호족이 성장하면 국가 이름, 그 지역에 무엇이 많은지, 무엇을 하고 사는지 지역 특성, 많은 정보를 글자 하나에 담겨 있습니다. 

 

랴오허(遼河, 요하, 표준어: 랴오허강)  혹은 요수(遼水)는 중국 동북지역 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보하이만을 통해 황해와 접해 있고, 서남은 내몽골 네이루허(内蒙内陆河) 강과 허베이 하이롼허(河北海滦河) 강 유역과 서로 인접해있다. 북쪽은 쑹화 강(松花江) 유역과 인접해있다. 랴오 강은 허베이(河北), 내몽골 자치구(内蒙古自治区), 지린(吉林)에 걸쳐있다.

랴오허(遼河, 요하, 표준어: 랴오허강)
위성지도에서 댐 건설로 보이지 않는 강 흐름, 랴오닝성 지역 요하 강 흐름을 보면, 홍산문화 유적지는 요하강 상류임을 알 수 있고, 강 주변 넓은 땅은 논농사 짓기에 좋고,산악 지형은 밭농사도 가능하다. 지형 형태를 보면 랴오닝성 요하는 상하류 지역에 같은 민족이 살게 될 환경이다.

 

*북방계 유목민족과 남방계 농경민족이 만나는 지역으로, 유목민과 정주민이 역사적으로 충돌하는 지역이고, 랴오닝성=요하=평양 있는 강으로, 중원과 산맥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지역으로, 요하 강을 중심으로 요서와 요동으로 구분할 수 있고, 랴오닝성 서쪽 경계 지역은 만리장성 끝으로 생각되는 갈석산 태행 산맥이 있다.

 

랴오닝 성은 세개의 지리적 지역으로 구별할 수 있다. 서부의 저산성구릉지대, 중부의 평원, 동부의 산지이다. 서부의 구릉지대는 주로 누루얼후(중국어 간체자: 老鲁儿虎, 정체자: 老魯兒虎) 산지이다. 이 산지는 랴오닝 성과 내몽골 자치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중부의 평원은 랴오허 강의 유역이다. 이 지역은 대체로 평평하고 고도가 낮다. 동부지역은 장백산(중국어 정체자: 長白山)과 천산(千山)으로 대표되는 산지이다. 산지는 바다로 이어지면서 랴오둥 반도를 형성한다. 랴오닝 성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화보쯔산은 이 지역에 위치한다. 평원으로는 랴오허 평원이 있으며, 랴오허(중국어 정체자: 遼河), 훈허(중국어 정체자: 渾河), 타이쯔허(太子河), 다링허(중국어 정체자: 大凌河), 샤오링허(중국어 정체자: 小凌河) 등이 있고 북조선과의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이 있다. 해안에는 약 500여개의 섬이 있다.[4]

 

이 지역 특징 요하 강과 현존하는 중국 만리장성을 위성 지도로 포토샵 합쳐봤습니다.

랴오닝성 요하 강 현존 만리장성 위성지도 병합
요하는 지리적으로 중원과 분리된 지역이다. 중원을 고려해서 축성한 만리장성 밖에 있고, 동호 유목지역과는 산악 지형으로 구분 된다.

 

지리적인 특징을 보면, 랴오허=요하 강은 만리장성 동쪽 끝 산맥과 내몽골 지역과 요하를 구분하는 산맥 내에 존재하는, 지리적으로 구분 할 수 있는 지역이고, 이 지역은 중국은 황하를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지역이란 뜻, 화북으로 지칭하는데, 중국적 관점이고, 진시황제 때 건축 한 만리장성 위치는 연나라 진개 요하 침공 이후기 때문에 원 동쪽 지역에 현재와 다른 형태 건축 방식으로 쌓았고, 현재 웅장한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요하 서남쪽 밖에 재건축 된 것입니다. 화북은 북경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요하가 추가 된 것은 현재 중국 땅이기 때문입니다.

 

화베이(화북, 중국어 간체자: 华北, 정체자: 華北, 병음: Huábei, 영어: Northern China 또는 North China)는 중국의 6대 중국지리대구(中國地理大區)의 하나로서 북부 지방이며, 화베이 평원이 그 중심이다.

중국 대륙의 중심인 중원(中原)은 역사적, 전통적으로 화이허(淮河)를 기준으로 화베이와 화난(華南)로 크게 구분해 왔다. 화베이는 황하를 중심으로 한 황하 문명의 발상지이고, 대체로 이 지역을 차지한 정치 세력이 중국을 통일하였으며, 현재도 화베이 지방의 베이징이 중국의 수도이다.

 

이 지역에 존재하는 주요 역사적 내용과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은, 북서쪽 지역에 위치한 홍산문화 유적지가 있고, 연나라 북경 방향 남동쪽으론 현존하는 만리장성 산맥이 있고, 동남쪽엔 환국 지명 흔적 고구려 졸본=오녀산성=환인현=화련만주족자치구가 있으며, 북서쪽 외곽 지역은 내몽골 유목 지역으로, 동호, 흉노, 선비족과 접촉하는 지역이다. 기원전 600~500년 경 동쪽 길림성 지역엔 스키타이로 생각되는 고리국이 동북 방향 쑹화강에 시작됐고, BC 300년 경 길림성 지역에 부여가 시작됐다. 

 

 

하가점 하층문화(하가점하층문화, 중국어 간체자夏家店下层文化정체자夏家店下層文化병음Xiàjiādiàn xiàcéng wénhuà Lower Xiajiadian culture[*])는 기원전 2200년부터 1600년경까지 현재의 중국 동북부, 내몽고 자치구 남동부, 허베이성 북부, 랴오닝성 서부를 중심으로 한 고고 문화를 말한다.

내몽고 자치구 츠펑 시 샤자뎬 유적의 하층을 표식 유적으로 한다. 같은 지역의 훙산 문화에 이어지며, 그 과도기를 샤오허얀 문화(小河沿文化)라고 한다.

생활의 중심은 잡곡 재배이며, 그 밖에 목축수렵도 행해졌다. 유적에서는 돼지, 개, 양, 소 등이 발견되었다. 정주 생활을 하면서 인구밀도는 높았다. 석기, 골기, 토기가 발견되고 있고, 그 밖에 금, 납, 칠기, 비취, 동기, 청동기도 발견되었다. 동기, 청동기로 만든 귀고리가 많고, 뼈를 이용하여 점도 행해졌다.

은 둥글고, 흙과 돌로 만들어졌다. 취락은 벼랑이나 경사면에 방어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또는 석벽을 취락의 주위에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같은 지역에서 그 후, 샤자뎬 상층문화가 퍼졌다.

 
하가점 상층문화(중국어 간체자夏家店上层文化정체자夏家店上層文化병음Xiàjiādiàn shàngcéng wénhuà)는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600년경, 현재의 중국 동북부에서 형성된 청동기 문화를 말한다.
 

내몽고 자치구 츠펑 시 샤자뎬 유적의 상층을 표식 유적으로 한다. 스키타이에서 유래된 유라시아 스텝의 청동기 문화의 영향이 강하다. 또 서주(西周)와 동시대에 이 영향도 있다.

현재의 내몽고 자치구 남동부, 허베이성 북부, 랴오닝성 서부를 중심으로 하여, 같은 영역에서 앞서는 샤자뎬 하층문화 보다 약간 넓은 범위에 이르러, 북쪽은 자모론 강의 북쪽에 이른다. 샤자뎬 하층문화에 비하면 인구밀도는 낮았다. 농업을 중심으로 했지만, 유목 생활도 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샤자뎬 하층문화에 비하면 토기는 뒤떨어지지만, 청동기나 석기가 더 우수했다. 청동기에는 검, 도끼, 도, 투구 등이 있고, 동물이나 자연에 대한 것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들은 스키타이로 연결된 유라시아 스텝을 통한 밀접한 문화적 접촉을 나타내고 있다. 후기가 되면 주나라(周 )양식의 청동기가 출현한다.

샤자뎬 하층문화에 비하면 항구적인 건축물이 적어서, 하층 문화의 건축물 또는 그 재료를 유용하는 것이 많아진다. 말과 마구가 많이 발굴되어 말이 중요한 생활 수단이 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가축은 돼지를 대신해 양이나 산양이 더 중시되게 되었다. 샤자뎬 하층문화에 비해 지배계층의 무덤은 더욱 호화로운 부장품을 가지며, 묘제는 적석총과 분구를 특징으로 한다.

 

*단군조선 단국은 BC2333(단기 4352년 전) 건국 했습니다. 하가점 하층문화 내용을 보면, 밭농사 농경 민족 유적은 단국과 상관 관계가 있고, 인구밀도가 높던 그런 하층 문화가 기원전 1600년까지 존재하다 사라졌습니다. 하가점 상층문화가 기원전 1000년 부터 시작 됐을 땐, 난데없이 인구 밀도가 낮은 유목민족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것이 북적(北狄) 상(商)나라 수도 조(朝)를 계승하는 어(魚)물고기 잡고, 양(羊)양치며 살던 유목민 선(鮮)이 단군 마지막 수도 아사달 = 조양(朝陽)으로 이동해서 세운 것이 조선(朝鮮)이고, 단군은 동쪽 요동으로 이동해서 단군조선이 시작된 것입니다. 밭농사는 단군(檀君) 환(桓-夷) 남방계 예(濊)물 많은 황해(黃海) 주변에 살던 동이(東夷)-환(桓) 흔적이고, 유목 흔적은 바이칼호 남쪽 설련하(偰輦河)에서 남하한 북방계 적(狄) 상(商)나라를 계승하는 맥(貊) 조선(朝鮮)이 만난 것이 단군조선, 연나라 진개 요하침공으로, 요서에 있던 조선은 옛 만리장성 밖 1,000리 떨어진 하얼빈으로 이동해서 조선을 계승하는 부여(夫餘)를 건국했는데, 여(餘)는 조선 건국자 상나라 왕실 자성(子姓) 기씨(箕氏) 이름이고, 부(夫)사내를 붙인 이유는? 상나라와 부여는 어머니 성(姓)을 며느리 적(嫡)이 잇고, 후처(後妻) 자녀들 씨(氏)를 창성(創姓) 적(嫡) 안주인(安主人)이 되는 초기 모계 성씨가 그대로 유지된 이유가 조공(朝貢)을 정한 날짜까지 정한 패(貝)돈과 공(工)특산품이 정(正)바르지 않은 족읍(族邑)은 복(攵)칠, 기마대를 보내 조정(朝政), 몰살시킬 정도로 강했기 때문에, 소국이 대국에 반란한 주(周)나라처럼 친족을 감시자를 보내 분봉하면 씨(氏)가 창성(創姓)되는 부계 성씨와 다른 성씨 구조를 갖고 있던 것이 신라 고려 초까지 지속됐고, 모계 성씨는 같은 아버지 자손들이라 해도 어머니가 성씨 안주인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다르면 혼인할 수 있었는데, 고려 중기에 중국과 교류하면서 부계 성씨 문화가 유입되면서 모계 성씨 문화가 사라진 것입니다. 부(夫)사내는 모계 성씨 문화에서 남자인 조선 건국자 여(餘)를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상(商)나라 시조 성(姓) 자(子)는 하(夏)나라가 설족(契族)을 아래사람으로 하대했던 것이 왕실 성(姓)이 된 것이고, 어머니 간적(簡狄)은 유융(有戎)씨의 딸, 적(狄)은 북적(北狄), 융(戎)은 화하족 주관(主觀)에서 서북쪽에 있던 융적(戎狄) 북방계로, 모계 성씨는 남자가 중심이 아닌, 여자가 중심에 있고, 남자는 자녀를 출산할 수 없어 스스로 대를 이을 수 없기 때문에 죽여도 보복할 자손이 모계 성씨 문화에선 없습니다. 모계 성씨는 제사를 주관하는 종부(宗婦) 어머니 성(姓)을 며느리 적(嫡)이 계승하고, 남자는 어머니 명을 따라 시(示)보일, 기둥을 세우고 판을 올린 제단위에, 건(巾)천으로 덮어 제단을 세운 제(帝)임금으로 부모 제사를 지내는 존재로 가족 울타리 백(伯)엄지 지도자 역할하는 것으로, 부여는 상나라 달력을 사용했고, 상나라 청동기 대부분은 제사도구, 한국인은 제사를 항상 중요하게 생각해왔습니다.

 

하가점 이란 용어는 중국 관점에서 쓴 것은, 여름 하夏 집 가家 점포 점店이란 명칭 자체가 중국 관점에서 본 하상주 단대 공정에서 그것이 나라 문명이란 전제를 깔고 붙인 이름으로 느껴집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것이 나라 문명으로 단정하는지 명확한 제시도 없는데, 중국말로 국내 학자들이 함께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랴오닝성은 만리장성 중원과 지리적으로 확실하게 구분되는 분리된 지역이고, 인구밀도 높던 하층 문화 사람들이 갑자기 어디로 갔을까요?

 

 

AD1281년(원판 부재 2003년 조선 초기 간행물)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조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을 함께 기록하고 있으나, AD 1287년「제왕운기」에서는 전조선(前朝鮮)이라는 항목에서 단군조선을 기술하고, 후조선(後朝鮮) 항목에서 기자조선을 언급하여 후속하는 위만조선과 함께 삼조선(三朝鮮)으로 구분한다.

 
둘 다 기자 조선이 망한 BC 194년으로부터 1475년이나 지난 후에 쓴 글, BC 91년 완성된 사기史記를 참고 할 수 밖에 없는 증거는, 중국적 관점에서 아침 해 뜨는 동쪽에 있는 나라란 뜻인 조선朝鮮을 썼다는 점에서 그렇다. BC 91년은 위만조선이 망한 BC 108년 17년 후, 10년 전 기록이고, 위만滿 문왕 희姬창 아홉째 아들 위卫=위강康숙 희姬봉封 후손 성씨姓氏인 점에서 중국 사람인 것을 알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사마천이 본 조선朝鮮은 중국의 일부로서 쓰여진 것이고, 삼국유사는 한국사, 위만조선이 빠진 것이 정상, 제왕운기 위만조선滿朝鮮 편성은 잘못된 것이다. 고조선 시기 중국 내 왕조 국가 명은 대부분 하夏상商주周 1 글자로 표현하고, 제후국들도 대부분 비슷한, 국명=성씨=지역, 1 글자로 표현되고 있는데, 중국 외곽 지역 있는 이민족들에게 중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이나 지역 특성 표현이 추가 된 것으로, 아침에 해가 고운 곳 동쪽은 중국에서 본 시각은 맞는데, 위만 조선 주변 상황 표현은 그시기 사람이 쓴 것이므로 사실에 가깝고, 따라서,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쓴 시점BC 300~249년 경 연나라 진개 요하 침공 이후 얘기로, 침공 전 기자조선 왕검성은 요하 평양, 침공 후 기자조선 왕검성은 현재 평양, 침공 후에 쓴 글이니 지리적 표현이 현재 평양 주변을 언급 할 수 밖에 없다. 사마천 이전 시기 연나라 진개 침공 BC300년 이전에 쓴, 중국 사람들 조선 표현은 아마도 현재 요하 지역 지리 상황과 일치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차이를 알지 못하고 이전 역사서와 지명 차이를 설명하면서 사실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商,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경)나라는 역사적으로 실제 했다고 여기는 최초 중국 왕조다. 반경(盤庚)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기 때문에 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은(殷)'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탓에 '은'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스스로 나라 이름을 칭할 때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으므로, 학계에서는 '상'으로 통일해 부른다.

 

상나라 시조에 관한 의견은 분분한데, 기록에 의하면 전설상 인물인 황제(黃帝)의 후손 탕왕(湯王)이 세웠다고 전한다. 탕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걸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개국하였다.

마지막 왕은 무희 달기와 함께 백성을 잔혹하게 다룬 30대 주왕(紂王)이며, 주(周)나라 시조인 서주 무왕(西周 武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전설상 왕조로만 다루었으나 20세기 초 은허(殷墟)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면서 실재하는 왕조로 인정했다.

출토된 청동기나,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독해함으로써 선사 사회부터 역사시대로 옮겨진 은나라 사회의 실태가 해명되기에 이르렀다.

 

전설상  왕조의 시조는 로 되어 있다. 설은 유융씨의 딸이자 제곡 차비인 간적이 제비의 알을 먹었기 때문에 낳은 아이로 되어 있다. 설은  때에 의 치수를 도운 공적이 인정되어 순에 의해 상에 봉해져 자씨 성(姓)을 받았다.

그 후 설의 자손은 대대로 하나라를 섬겼다. 또 설로부터 까지의 14대 사이에 8차례 수도를 이전 했다고 한다.

 

商나라 왕의 선조

묘호 칭호 성명
(契) 자설(子契)
소명(昭明)  
상토(相土) 자상토(子相土)
창약(昌若)  
(曹)  
(冥) 자명(子冥)
고조(高祖) 왕해(王亥) 자해(子亥)
왕항(王恒) 자항(子恒)
상갑미(上甲微) 자미(子微)
보을(報乙)  
보병(報丙)  
보정(報丁)  
시임(示壬)  
기종(夔宗) 시계(示癸)

 

商나라 역대 왕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사기 갑골문자 재위기간
1대 태조
(太祖)
태무왕
(太武王)
자리
(子履)

(湯)
당, 대을
(唐, 大乙)
기원전 1600년 ~ 기원전 1589년
2대   애왕
(哀王)
자승
(子勝)
외병
(外丙)
복병
(卜丙)
기원전 1588년 ~ 기원전 1587년
3대   의왕
(懿王)
자용
(子庸)
중임
(仲壬)
  기원전 1586년 ~ 기원전 1583년
4대 태종
(太宗)
문왕
(文王)
자지
(子至)
태갑
(太甲)
대갑
(大甲)
기원전 1582년 ~ 기원전 1571년
5대   소왕
(昭王)
자순
(子絢)
옥정
(沃丁)
  기원전 1570년 ~ 기원전 1542년
6대   선왕)
(宣王)
자변
(子辯)
태경
(太庚)
대경
(大庚)
기원전 1541년 ~ 기원전 1517년
7대   경왕
(敬王)
자고
(子高)
소갑
(小甲)
  기원전 1516년 ~ 기원전 1500년
8대   원왕
(元王)
자밀
(子密)
옹기
(雍己)
  기원전 1499년 ~ 기원전 1487년
9대 중종
(中宗)
경왕
(景王)
자주
(子伷)
태무
(太戊)
대무
(大戊)
기원전 1486년 ~ 기원전 1422년
10대   효성왕
(孝成王)
자장
(子莊)
중정
(中丁)
중정
(中丁)
기원전 1421년 ~ 기원전 1401년
11대   사왕
(思王)
자발
(子發)
외임
(外壬)
복임
(卜壬)
기원전 1400년 ~ 기원전 1386년
12대   전평왕
(前平王)
자정
(子整)
하단갑
(河亶甲)
전갑
(戔甲)
기원전 1385년 ~ 기원전 1377년
13대   목왕
(穆王)
자등
(子滕)
조을
(祖乙)
차을
(且乙)
기원전 1376년 ~ 기원전 1358년
14대   환왕
(桓王)
자단
(子旦)
조신
(祖辛)
차신
(且辛)
기원전 1357년 ~ 기원전 1342년
15대   희왕
(僖王)
자유
(子踰)
옥갑
(沃甲)
강갑
(羌甲)
기원전 1341년 ~ 기원전 1337년
16대   장왕
(莊王)
자신
(子新)
조정
(祖丁)
차정
(且丁)
기원전 1336년 ~ 기원전 1328년
17대   경왕
(頃王)
자경
(子更)
남경
(南庚)
  기원전 1327년 ~ 기원전 1322년
18대   도왕
(悼王)
자화
(子和)
양갑
(陽甲)
상갑
(象甲)
기원전 1321년 ~ 기원전 1315년
19대 세조
(世祖)
문성왕
(文成王)
자순
(子旬)
반경
(盤庚)
반경
(般庚)
기원전 1314년 ~ 기원전 1287년
20대   장왕
(章王)
자송
(子頌)
소신
(小辛)
  기원전 1286년 ~ 기원전 1252년
21대   혜왕
(惠王)
자렴
(子斂)
소을
(小乙)
  기원전 1251년
22대 고종
(高宗)
양왕
(襄王)
자소
(子昭)
무정
(武丁)
  기원전 1250년 ~ 기원전 1192년
23대   후평왕
(後平王)
자약
(子躍)
조경
(祖庚)
차경
(且庚)
기원전 1191년 ~ 기원전 1148년
24대 세종
(世宗)
정왕
(定王)
자재
(子載)
조갑
(祖甲)
차갑
(且甲)
기원전 1148년
25대 갑종
(甲宗)
공왕
(共王)
자선
(子先)
늠신
(廪辛)
  기원전 1148년
26대 강조
(康祖)
안왕
(安王)
자효
(子囂)
경정
(庚丁)
강정
(康丁)
기원전 1148년
27대 무조
(武祖)
열왕
(烈王)
자구
(子瞿)
무을
(武乙)
  기원전 1147년 ~ 기원전 1113년
28대   광왕
(匡王)
자탁
(子托)
태정
(太丁)
문정
(文丁)
기원전 1112년 ~ 기원전 1102년
29대   덕왕
(德王)
자선
(子羡)
제을
(帝乙)
  기원전 1101년 ~ 기원전 1076년
30대   주왕
(紂王)
자수
(子受)
제신
(帝辛)
  기원전 1075년 ~ 기원전 1046년

 

은대의 국가는 왕이 거주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그 주위에는 농업생활을 영위하는 여러 촌락이 전개되어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은 농민을 지배하여 곡물을 조세로 징수해서 일족(一族) 및 예속되어 있는 가내노예나 각종 기술자들을 부양했다. 농민은 하나의 대가족 집단이 하나의 마을을 구성하고 마을의 경작지에서 영농을 하고 있었다. 이 혈연 촌락은 족장의 통솔 밑에 어느 정도의 자위조직(自衛組織)도 가지고 공동작업에 종사하여, 자율적인 생활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지배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농민을 장악하기보다는 족장들을 장악하고, 족장들을 통해서 촌락을 지배했다.

 

왕=큰집 적장자

성姓

 대종손

宗孫, 혈연 촌락 족장=파생된 씨氏 소종손宗孫, 농민=전쟁에서 잡아온 농사짓는 노예, 죽은 조상, 창성創

시조

를 신神으로 모시는 적장자 종손宗孫은 정신적 사제=왕으로서 성씨

氏혈족血族 국가의 중심으로, 주나라가 상

商나라를

 멸했을 때,

 유민들이 조상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상 태자 무경을 상商

수도 조가에 분봉했고, 동생 3명 감시자로 배치 사기에 언급 돼있다. (무왕 사후 성왕 숙부 네째 주공 단 섭정 할 때, 태자 무경과 성왕 숙부 세째 관숙 선, 다섯째 채숙 도, 곽숙 처, 삼감의 난 일으켰고, 평정후 형인 관숙 선 상태자 무경 처형, 동생들은 유배 보냈다.) 상商나라 조상 모시는 제사가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였기 때문에, 씨족 종손을 왕으로, 감시자를 친동생들로 붙인 것입니다. 상나라 조상 모시는 것이, 한국 명절 때마다 세대 갈등 골치 썩는 것처럼, 쉽게 단절 할 수 없는 요소인 것을 알 수 있고, 나라 15만 인구로 거대한 중국 지역 분할,

희성姬

주족族을 왕으로 분봉하면서, 종중혈족 시스템이 아닌, 낙하산 다른 혈족에게 바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봉건왕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은나라 시대의 정치는 신권정치로서 제사·정벌·권농·목축 등 주요한 국사는 신의 뜻을 묻는 (占)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사회는 부권적(父權的) 씨족제로서 처음은 형제 상속이었으나 곧 부자상속으로 되었다. 귀족은 더없이 정교한 청동기·백도(白陶)·옥기(玉器)를 사용하고 있었다. 농민은 목제 농기구나 석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보리·수수·기장 등을 재배하고, 양잠을 하였으며, ··돼지· 등을 사육했다.[2]

 

상나라 사람들은 제(帝)가 우주의 지배자이며 그 의지에 따라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점을 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신정 정치가 이루어졌다. 갑골문은 상제의 의향을 묻기 위한 행위의 기록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제에 대한 제사와 조상 숭배가 합쳐져서 상나라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제정일치 국가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상나라 시기에 정교한 청동기가 발달되었는데 이러한 청동기는 바로 신정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신정적 권위는 쇠퇴하고 세속적 권위를 강화해 간 왕권이 성장하였다.

 

상나라 청동기는 아마도, 지금과 똑같은, 실생활에서 쓰지 않는 제사 용기들로 생각됩니다. 적장자인 종손 왕은 성씨 혈족을 이끄는 가장인데, 일종의 행사를 주관하는 사회자 같은 역할, 따라서 왕권 성장했다는 것은, 제사의 목적이 혈족 조상을 기리면서 우리가 한 핏줄 가까운 것을 확인하고, 문제에 대한 해법 가족들과 찾는 것인데, 사회자가 모든 결정을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뜻, 왕은 실존했던 조상 '신'의 대리자, 교회는 실존하지 않는 모든 문제의 무조건 정답인'신'의 대리자가 목사, 왕처럼 자기 맘대로 세습하려 하죠? 그것이 왕권 강화입니다. 조상 '신'은 동질성을 확인하는 부수적인 것, 본 목적은 가족과 문제 해결하고,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조상 '신'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상제(上帝)=죽은 부모의 하늘에 있는 혼(魂)얼 정신

대종(大宗) 환인(因) 서자 환웅(雄) 소종(小宗) 단씨(氏) 시조(始朝) - 나라가 망하면 적자(嫡子)는 망한 나라 이름으로 불립니다. 연나라 요하침공에 평양으로 이동했던 단군은 위만에 속아 평양을 뺏기면서 단군이 망했고, 단군은 해로를 따라 남하 한(韓)을 세웠습니다. 환준(桓準)준이 단준(檀準)이 된 것이고, 새나라를 창업했기 때문에 나중에 백제 온조에게 한(韓)이 망했으므로, 망한 나라이름 한씨(韓氏) 시조 한준(韓準)이 되는 것이고, 단군 황실 성(姓)은 환(桓)-단(檀)-한(韓)이 되는 것입니다.

 

대종(大宗) 설(契)은 상(商)나라를 창업했기 때문에 설(契) 성(姓) 대종은 망한 상(商)나라 이름 상씨(商氏)가 되는데, 삼감의 난 실패로 죽었기 때문에 왕실을 잇는 적(嫡) 상씨가 존재하는진 알 수 없고, 역성혁명에 성공한 화하족 주(周)나라 전신인 하(夏)나라는 상나라를 자(子)로 불렀기 때문에 상나라 대종은 자(子) 성(姓)으로 불리고, 옛날 한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기 때문에, 공자(孔子), 기자(箕子)가 상나라 왕실에서 파생된 성씨란 것을 알 수 있는데, 공자는 유교 성인이기 때문에, 자(子)는 선생님이란 지칭으로도 쓰입니다. 족보는 적장자가 사망하면, 차순위가 적(嫡)으로 종(宗)을 계승하는데, 미자(微子)는 역성혁명에 동조 3년 동안 삼감의 난을 평정하는데 앞장서 BC1046년 주나라 상민(商民) 왕(王)임금으로 노예를 대표하는 임금이 됐기 때문에, 상인(商人)사람으로 상나라를 계승한 사람이 BC1122년 주무왕 반란 때 감옥에서 풀려나서 일족을 이끌고 요하로 이동해 조선(朝鮮)을 세운 기자(箕子)가 상(商)나라 적(嫡)을 계승하는 제(帝)임금이 되는 것입니다. 대종 성(姓) 설()-자()-상(商),기()-조선(朝)이 하얼빈으로 이동해서 부여(夫)을 세웠고, 망했다고 보면 대종은 선(鮮)이 되는 것이고, 계승했기 때문에, 여(餘)가 남부여 백제 마지막 태자 여성(餘姓)으로 이어졌고, 당나라에 끌려가 서씨(氏)가 대종을 잇는 것입니다.

 

나라는 읍제(邑制)국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읍이란 씨족 집단을 중심으로 성벽을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읍은 대읍과 족읍, 소읍으로 나뉘는데, 대읍은 상나라 왕이, 족읍은 상나라 왕과 연합관계에 있던 씨족의 우두머리, 소읍은 씨족의 우두머리와 연합관계에 있던 동족집단의 우두머리가 각각 통치하였다. 이 처럼 누층적으로 구성된 읍들 사이와 정치적 연합관계를 봉건(封建)관계라고 부른다. (대종 소종 성씨 씨족 혈연 관계이기도 합니다.)

 

19세기 말에는 허난성(河南省)에서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곳에서 갑골문자가 새겨진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은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의 사마천이 《사기》(史記) 속에 기술하였는데, 갑골문자 속에 나타난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가 《사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은허에서 출토되는 갑골문에 의하여 은나라 왕의 존재가 인정되고, 특히 은허로 도읍을 옮긴 후, 반경의 동생인 왕 무정(武丁) 이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재가 확인되었다. 은허로 수도를 옮긴 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제 연대는 기원전 14세기 말부터 기원전 11세기 중엽이다.

 

1899년에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됨으로써 그 실존이 알려졌는데, '갑골'이란 거북의 뱃가죽뼈와 소의 어깨뼈를 말한다. 갑골문이란, 갑골의 안쪽 면에 불에 달군 나무를 눌러 급속히 팽창시키면 표면에 국부적인 균열이 생기는데, 그 균열의 상태를 보아 점을 치고 거기에 점친 날짜와 점쟁이의 이름, 점친 내용과 결과 등을 새겨 넣은 글을 말한다. 갑골문의 주요 내용은 주로 조상신이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여부, 전쟁의 가부, 농사의 풍흉,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재해의 유무 등 왕의 통치와 관련된 다양한 사안들이었다.

 

상인商人라는 말은 상나라 사람들이 나라가 멸망한 후에 생업을 위해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물건을 팔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구체적으로 몇 년인지를 추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은 이 사건을 기원전 1046년의 일로 보고 있다.(단기 기록 서기로 바꾸면BC1122년)

예전의 설로는 죽서기년에 무왕에서 유왕(서주의 마지막 왕)까지 257년이는 기술이 있어 유왕이 죽은 것이 기원전 771년의 일이므로 상나라가 멸망한 것은 기원전 1027년이 된다. 또 한서에는 주는 867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술이 있어 이것으로부터 기원전 1123년의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설이 있어, 상나라 멸망을 가장 오래전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127년, 가장 나중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018년이다.

 

랴오닝성에서 하가점 하층문화를 형성하고 있던 세력이 남하해서 하나라를 치고 상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최초 출발 지역인 랴오닝성 농경 민족이 사라진 것이고, 기원전 1122년 주나라에 망하고 기자가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평양(랴오닝성)으로 돌아갔을 때, 본향으로 돌아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은허 유적과 홍산문화 유적은 같은 문명으로 취급되고 있죠? 옥기유물, 동물뼈로 보는 점, 갑골문자, 옥황상제 개념도 그렇고, 상나라는 우리에게 친숙한 문화 흔적을 갖고 있습니다.

 

요하 지역에 살던 민족중국 주나라 후기 춘추시대 공자나 사마천 관점에선 중국을 통치했던 국가라, 중국의 역사, 중국 민족으로 보는 것이고, 그 지역에 뿌리를 둔 한국인이 보는 요하 지역 하층문화와 상나라는 환국 후예인 단군조선 단국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하가점 상층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단국=상나라가 중원을 통치하다 주나라에 밀려 1122년 요하로 상왕족 기자가 유민을 이끌고 돌아간 이후, 기자조선 평양=요하 북서쪽 홍산문화 유적 지역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북서쪽 지역은 초원지대 유목민족과 경계하고 있는 지역, 그 지역 유목 민족은 동호, 흉노, 선비, 이들 문화가 유입되면서 상층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호(중국어 간체 : 东胡, 정체자 : 東胡, 병음 : DōngHú)는 춘추 시대부터 내몽골의 동부지역에 거주했던 민족이다. 이들은 유목과 수렵생활을 기반으로 살았다.

'동호'의 어원이 '퉁구스'라는 설이 있으며, 선비족거란족과 현재의 몽골족다우르족부랴트족 등이 동호의 후예이다.

 

동호가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가 모호하지만, 여러가지 가설이 있다. 상나라 말기에 요서 지방에서 흥한 샤자디안 하층 문화를 이룩한 원주민 집단을 정복하고, 단계적으로 유목 생활로 바꾸고 거주한 집단 중에 그 지역에 잔류하여 남은 부족이 동호족의 조상이라는 설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근거에는 상나라 시기에 샤자디안 상층 문화기에 지어진 무덤에서 발굴된 개의 유골이 있다. 개를 부장하는 것은 호의 후예인 오환족의 전형이다. 따라서 동호족이 샤자디안 상층 문화를 향유하던 민족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외의 가설에는 이 지역에 있던 토방과 그 후에 주나라 시대에 있었던 도하를 동호의 조상으로 여기는 설과 춘추 시대에 연나라의 북방에 있던 산융 등의 유목민을 전국 시대 이후에는 사람들이 동호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동호족의 사용하는 언어 계통에 대하여, 옛날에는 퉁구스계, 또는 몽골 퉁구스 혼혈이라고 하였다. 혹은 동호의 후손인 선비족의 언어 계통이 튀르크계 언어, 튀르크과 몽골이 혼합 언어설이 있었지만 어느 설도 지지를 받고 있지 않다.

근년에는 선비족의 한 구성원인 탁발 선비의 언어가 몽골계 언어였고, 동호족의 유적에 출토된 유물에서 선비족과 오환족이 풍습이 공통되었다는 사실이 밝히면서, 동호가 계통이 몽골계 유목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스키타이(고대 그리스어Σκὐθαι)는 동부 아리안인(Eastern Iranian)이다. 그 이름은 헤로도토스(Herodot)에 따르면, 스콜로토이(Skolotoi)에서 유래한다. 스키타이(Scythian), 스쿠드라(Skudra), 소그디아(Sogdian), 사카(Saka), 스구디아라고도 한다. 기원전 9세기에서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의 기록이 존재한다.

 

스키타이족은 이란계의 기마민족(Eurasian nomads)이다. 우라르투의 유적들이 소련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기 이전에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보통 이 스키타이족으로부터 시작했다. 그 까닭은 이들이 러시아인과 혈통적으로 상관은 없는 기마민족이지만 오늘날의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영토에 살았던 민족들 가운데 역사책에 언급된 최초의 민족이기 때문이다.

 

스키타이족은 기원전 6세기(기원전600년부터)경부터 기마 민족으로서 중앙아시아와 동부유럽에서 건너와서 지금의 중앙아시아지역과 유럽스탭(steppe)지역 그리고 현재의 러시아연방의 영토에 있는 지역을 걸져서 고대에 국가를 건설하였다.

 

스키타이는 동쪽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사카"라고도 불렸는데 지금의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쿠르간묘(Issyk kurgan)에 황금 인간(The golden man)이라고 불리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스키타이는 동쪽으로 동북아시아 스텝지역(現몽골초원)을 지나서 동아시아에서도 교역하였으며 스키타이인이 쓰는 검인 Gorytos는 경로라는 이름으로 흉노에게서 사용되었다. 스키타이는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흉노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흉노가 동쪽으로 동북아시아 스텝지역을 차지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스키타이는 또한 동아시아에서 대한민국과 일본의 고대 공예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기원후 4세기에 사라졌다.

고고학계에선 고대 인골 DNA를 분석을 하며 연구를 하는데 한반도,몽골,우즈베키스탄의 고인돌 부계 DNA 분석을 한 결과 신라인의 고대 인골의 DNA가 중앙아시아의 청동기 문화의 안드로노보 문화의 영향을 받은 스키타이인의 인골 DNA와 근접하며 이는 흉뇨,몽골,스키타이의 인골 DNA의 근접성보다 신라인과 스키타이의 인골 DNA의 근접성이 더 높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연구 내용은 KBS 스페셜에도 방송되었다.

스키타이 신라 유전적 비교
한반도, 몽골, 우즈벡, 고인골 부계 DNA 분석 결과 신라인과 스키타이는 현대 한국인 보다 더 가깝다.

 

고리국(槀離國, 기원전 5세기~기원전 2세기)은 만주 쑹화 강 북쪽 지역에 있었던 한국의 옛 나라이다. 탁리국(橐離國), 색리국(索離國), 탁근국(卓斤國)이라고도 부른다. 고리국은 기원전 5세기 북만주 송눈 평원에서 활동한 부여계 종족이 세운 국가로서 부여의 전신에 해당하는 국가이다.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은 고리국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백제가 고리국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고리국의 위치는 오늘날 중국 헤이룽장 성의 하얼빈 시 부근으로 비정된다.

 

한국의 고대 국가인 고구려의 근간인 맥족(貃族)이 코리족(고리국인)의 한자식 표기라는 견해도 있다.

고리국은 부여의 건국 설화에 등장하는 나라이다. 부여를 건국한 동명왕은 고리국왕의 시녀가 낳은 아들이다. 고리국왕은 동명(東明)이 활을 잘 쏘았기 때문에 장차 나라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동명을 죽이려 하였다. 이에 동명이 고리국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도망가다가 엄호수를 건너 부여를 건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명의 부여 건국 설화는 다양한 역사서에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나라 이름은 각 문헌별로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 서기 60년 후한의 왕충이 쓴 《논형(論衡)》에는 탁리국(橐離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3세기에 서술된 진수의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부여편에는 고리국(高離國)이라고 하였다.
  • 5세기에 편찬한 범엽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부여편에는 북이(北夷)의 색리국(索離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가 고리국에서 나왔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 7세기에 편찬한 《북사(北史)》에는 "백제국은 대체로 마한의 족속이며 색리국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 815년 일본 천황의 명으로 편찬한 《신센쇼지로쿠(新撰姓氏録)》에는 "백제는 부여 땅의 탁근국 왕의 시녀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리국의 위치는 부여의 북쪽 끝 지역에 해당하는데, 한서 상층-망해둔 문화는 연대가 이미 전국시대에서 서한시대에 이르며, 분포 범위는 한서 하층보다 넓으면서 주거지에서는 좁쌀이 나와 농경의 존재를 시사해 준다. 검자루맞추개돌이 나와 청동단검이 응용되었다고 추정되는 망해둔-한서 상층문화를 고리국 문화로 보기도 한다.[3]

고리국의 위치는 오늘날 만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눈강의 동쪽, 쑹화강의 북쪽에 있는 평원 지대로서, 송눈평원의 동부와 송요평원의 북쪽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 위치는 오늘날 중국 헤이룽장성의 하얼빈 시 부근이다. 유태용은 5세기 중엽 부여가 고구려와 물길 등 주변 세력으로부터 침략을 받자, 부여의 일부 유민들이 나하를 넘어 부여의 옛 선조들이 살았던 고리국 지역으로 되돌아가서 두막루(豆莫婁)라는 나라를 건국한 것으로 추정하였다.[4] 이 학설에 따르면, 오늘날 중국의 하얼빈 시 지역에는 고리국 - 부여 - 두막루로 이어지는 부여계 국가가 기원전 5세기부터 서기 726년까지 약 1,300년 가량 존재했으며, 결국 8세기 초에 발해로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흉노(

중국어

匈奴

병음

Xiōngnú 

슝누[*]

몽골어ᠬᠣᠨᠨᠣ 

콩노

)는 기원전 4세기부터 5세기까지 몽골 및 중국 북부 지역에 존재한 유목제국이다.[2] 기원전 3세기 무렵 몽골 고원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전성기에는 시베리아남부, 만주 서부, 중화인민공화국의 내몽골 자치구(內蒙古自治區), 간쑤 성(甘肅省), 신장 위구르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까지 지배하였다. 한나라와 군사적 충돌을 겪기도 하였고, 때로는 조공무역이나 결혼동맹을 하는 등 복잡한 관계를 맺었으며, 결국 한무제 때 한나라의 공격으로 급격하게 쇠퇴하였다.고고학계와 사학계에선 흉노족은 몽골계가 아닌 튀르크계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튀르크라는 용어는 서기 6세기 경에나 중국 사서에 등장하기 때문에[3] 몽골 고원과 투르키스탄을 공유했던 흉노 제국의 지배 종족이 어느 집단에 속하는지는 정확히 속단할 수 없다.

 

흉노가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기원전 4세기 말 중국의 전국시대의 기록이다. 기원전 318년, 흉노는 (韓), (趙), (魏), (燕), (齊)의 다섯 나라와 함께 (秦)을 공격했지만, 결과는 6국의 참패로 끝났다. 이후 조의 효성왕(孝成王, 재위: 기원전 265년 - 기원전 245년)의 시대에 장군(將軍) 이목(李牧)이 대(代)의 안문(雁門)에서 흉노를 막아 싸워서 흉노 선우(單于)의 군을 격파하였다. (선우는 흉노를 이끄는 대장의 호칭으로,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효성왕과 싸운 선우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기원전 215년, 장군 몽염(蒙恬)을 보내 융적(戎狄) 즉 흉노를 토벌하여 하남의 땅(오르도스 지방)을 점령하고 흉노를 축출한 뒤, 감숙(甘肅)에서 요동(遼東)까지 장성을 쌓아 북방 기마민족들의 침공을 막았다. 당시 흉노의 두만(頭曼, 터키어Tumen, Teoman)은 여러 차례 중국을 공격하다 화평을 맺었는데, 두만은 기원전 210년에 사망하기 직전에 황하(黄河)를 넘어서 화평의 걸림돌이 되는 자신의 태자인 묵돌(冒頓)을 인질로서 서쪽의 월지국(月氏國)에 보냈다. 보낸 직후 월지를 공격하여 아들을 죽이려 했고, 가까스로 월지를 빠져나온 묵돌은 귀국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모아 자신을 죽이려는 아버지 두만 선우를 시해하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묵돌이 선우가 된 209년에는 진시황이 사망한 직후였으며 이로 인해 진나라가 큰 혼란에 빠져 중국은 초한전쟁이라는 내전을 치르고 있었다. 진나라의 쇠퇴를 기회로 삼아 묵돌은 군사를 강화시켜 동쪽의 만주 서부지역에 위치해 있던 동호(東胡)의 부족장을 죽이면서 동호를 멸망시키고, 나아가 서쪽의 천산산맥과 감숙 지방에 자리잡은 월지국(月氏國)을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몰아냈으며 남쪽으로 누란(樓蘭), 백양하남왕을 병합해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

묵돌이 북쪽으로 혼유(渾庾), 굴야(屈射), 정령(丁零) 등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켜 몽골 초원 부족들의 추장이 된다. 한편 그 시기 중국에서는 전한(前漢)의 유방(劉邦)에 의해 내란이 수습되었다. 기원전 200년에 흉노는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그곳을 지키고 있던 한왕 신(韓王信)의 항복을 받아내고 태원(太原)으로 진격, 진양(晋陽)으로 나아갔다. 그곳에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유방이 친히 이끌고 온 한군이 도착했으나, 큰 눈과 추위로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많은 병사가 추위로 곤욕을 치렀다. 묵돌은 한군을 북쪽으로 유인하고자 거짓으로 물러났고,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간 포위된 유방은 진평(陳平)의 헌책에 따라 묵돌의 알지(閼氏, 역대 선우의 어머니)를 움직여 공격이 잠시 느슨해진 사이에 가까스로 달아났다. 이후, 전한은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화친의 결과 전한과 흉노는 형제 관계를 맺었으며, 유방은 "흉노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공물을 바친다.
  •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는다.
  •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 시기 전한이 흉노의 속국과 같은 존재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영토는 동쪽으로 동호와 예맥(濊貊), 북쪽으로 예니세이 강 상류, 서쪽으로 동 투르케스탄, 남쪽으로 중국의 오르도스 지방과 칭하이 성(靑海省)의 북부에 이르렀다.

 

연나라(燕國)는 중국 춘추 시대의 주나라 제후국이자, 전국 시대의 전국 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주 무왕 희발(姬發)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의 동생 소강공(召康公) (奭)을 연(燕)의 제후에 봉했다. 그러나 주나라 초기 연나라의 초기 역사에 모르는 것이 많다. 하남성(河南省)지역에 연나라가 있어서, 구별하기 위해서 하남성 지역의 연나라를 남연(南燕)이라 칭하고, 소공석의 연나라를 북연(北燕)이라고 호칭하였다. 당시에는 연(燕)이 아닌 언(匽, 郾)이라는 한자로 표기하였다. 소공석의 후손들은 산동성(山東省) 지역의 제후로 봉해졌지만, 주 성왕의 치세에 현재의 북경 부근으로 옮겼다.

이 때, 현지에 있던 섬서성(陝西省) 출신의 한후(韓侯)라고 칭하던 세력이 동쪽으로 옮겨졌다. 그 주민들은 대부분 한씨(韓氏)를 사용하였다. 한국의 사학자 이병도는 이 한후 세력을 한씨 조선(韓氏朝鮮)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연나라 동부에 기후(箕侯)라는 세력이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연나라의 속국이 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멸망했다. 춘추시대 이후, 연나라의 사대부층에 한씨와 기씨를 성으로 사용한 사람도 있었다.

  • 전국 시대로 들어서고, 기원전 334년경에 사기 소진열전(史記 蘇秦列傳)에 의하면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반도, 북쪽으로 임호와 누번, 서쪽으로 운중과 구원, 남쪽으로 호저와 역수(易水)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 당시 연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 조선에 이르고, 남쪽으로 역수(易水)까지 영토가 이천여 리에 달했으며 갑병 수십만과 전차 6백승(乘), 기병 6천기(騎)를 낼 수 있었다. 기원전 323년에 왕으로 자칭하였다.

 

진개(秦開, ?~?)는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燕)의 장군이다. 동호(東胡)와 고조선(古朝鮮)을 정벌하여 많은 영토를 획득하여 "현명한 장수(賢將)"라 칭해졌다.

진개의 정확한 활동시기는 알기 어렵다. 다만 《사기》 흉노열전에서는 진개가 조 무령왕이 운중(雲中) · 안문(雁門) · 대(代) 등의 3군을 설치한 후에 활동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략 무령왕이 재위 26년(기원전 300년)에 운중을 차지한 이후의 일에 해당되고, 또한 그의 손자인 진무양(秦舞陽)의 활동시기가 기원전 227년인 것을 보면 대략 기원전 3세기 초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개는 본래 호(胡, 북방 이민족)에 인질로 보내져서 그 곳의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이후 연나라로 돌아간 진개는 군대를 거느리고 동호(東胡)를 습격하여 패주시켰는데, 당시에 동호는 1천리나 물러갔다. 이후 연나라는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고 상곡(上谷) · 어양(漁陽) · 우북평(右北平) · 요서(遼西) · 요동(遼東) 등에 군을 설치하여 호(胡, 북방 이민족)의 공격을 방어했다.

이후 조선(朝鮮)의 왕과 연나라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자, 연나라에서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방(西方)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당시에 진개는 2천리에 이르는 땅을 취하였고, 조선과 연나라는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삼았다. 이 일로 인하여 조선은 이전에 비해 크게 쇠약해졌다고 한다. 이후 진개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연나라 진개 기자조선 침공전인 BC500년 경 중국 지도를 보면, 요하지역은 기자조선 영역입니다.

BC 500년 중국 지도
중국 연나라 경계는 산맥끝까지 요하 지역과 무관하다. 훨씬 전에 하夏나라, 상商나라 주周나라가 존재했던, 수천년 동안 경험했던, 중국인들이 왜 요하를 버렸을까? 자기들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곳에서 발굴된 유적 이름에 중원 국가인 하夏가점을 쓴 것은 역사 왜곡이다.

 

랴오닝성 북서쪽엔 원래부터 유목민족인 동호족이 있었고, 흉노가 동호족과 예,맥=기자조선 지역을 영토로 표현하고 있지만, 흉노는 유목 기마 민족,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도 조공했던 마당에, 완전한 점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연나라 침공전까지 랴오닝성 지역은 기자조선 통제권 안에 있었습니다.

 

연나라 진개 침공 후 중국 지도인, 

항우 서초BC 206~202년 18지역 지도를 보면, 

항우 서초18왕 BC 206~202년 중국 지도
BC500년 경엔 만리 장성까지만 중국 땅으로 표시했는데, BC300년 연나라 진개 요하 침공으로 점령한 지역이 추가 됐고, 한반도 만번한=청천강 유역까지 표시된다. 기자조선이 요하 지배권을 완전히 잃었다는 뜻, 기자조선은 BC194년 위만에 망했기 때문에, 요하 평양 왕검성 수도는 현재 평양으로 왕검성 이전하게 된다.

 

요하지역 넓고 평평한 땅=평양=양평, 왕검성=왕이 머무는 성은 진개 침공으로 기자조선이 망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수도를 현재 평양으로 이전 할 수 밖에 없었고, 약 100년 정도 후인 BC 194년에 완전 망했습니다.

 

연나라 진개가 기자조선 침공 전까진, 요하지역은 기자조선 영향권 내에 있었고, 동호는 흉노족 속국으로 북서쪽에 존재했는데, 침공 후, 기자조선은 요하지역을 완전 상실했고, 연나라는 남쪽으론 만번한=청천강 북쪽 지역까지 진출했으며, 기자조선이 침공후 현재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했다. 요하지역을 점령한 연나라는 이민족,  기자조선 현재 평양=왕검성까지 BC194년 연나라 사람 위만에 망하면서, 기자조선 마지막 왕 기준은 유민을 이끌고 남하, 마한을 세우면서, 나라를 세우거나 망할 때 바뀌는 성씨 시스템에 따라서 청주한

 시조가 됐다.

 

위만은 1000여명에 불과한 연나라 사람들로 평양지역 점령했기 때문에, 사회 지도층은 남하했지만,  위만조선이 망하기 전까지 지속적인 한족 유입 있었고, 한나라가 제후국으로 생각하던 위만조선 왕이 통제 되지 않자 정벌하고 한 4군현을 설치한 것으로, 진개 침공때 기자조선이 랴오닝성 전체를 잃지 않았다면, 위만조선이 망한 후 한4 군현 위치는 말도 안될 수 밖에 없지만,  진개 침공후 랴오닝성 전체를 잃었기 때문에 현재 한 4군현 위치나 낙랑지역 한족 문화나 유물 발견 당연한 겁니다. 

한 4 군현 위치와 영역
조선현=평양=기자조선 후기 왕검성, 현재 평양에서 위만에 기자조선 망했기 때문에, 이런 한 4군현 배치 형태가 당연하고, 관련 한족 유물 출토되는 것.꽤 오래 점령하고 있었고 역사적으로 중국땅은 아니지만, 환국 단국 상국 기국을 가상 국가로 만들고, 한민족 운운하면, 마한 시기 이후를 말하기 때문에 평양은 중국땅이란 시진핑 논리 가능해진다.

 

 

조선현 표시된 곳은 현재 평양이고, 중국 한족 입장에선 위만조선 왕검성=평양을 멸망시키고 4군현 낙랑 세운곳이니 조선현으로 부르는 것이 당연하고, 조선은 단국을 중국 관점에서 호칭하는 것입니다. 고구려현으로 표시된 주변 지역이 졸본부여 오녀산성, 환인 현 있는 위치입니다.

 

기자조선 마지막왕 기준이 마한을 세운 한강 이남 지역에서, 고조선 유물 비파형동검 유물 경기도 광주, 전라남도 부여에서 출토됐고, 청주는 그 중간에 있는 지역으로, 나라가 망하고 새로 나라를 세울 때, 성씨가 바뀌는 시스템에서, 기준이 한준으로 바뀐 마한 왕조와 상관 관계가 있고, 마한은 나중에 내려온 백제 온조에 망했습니다.

 

부여(扶餘, 기원전 3세기 ~ 494년)는 한국의 고대국가인 초기 국가(연맹 왕국)들 중 하나로,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하얼빈아청위수눙안창춘솽양지린옌지훈춘치치하얼룽장)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부여는 멸망하였다.

단군조선이 기원전 194년에 멸망으로 해체되면서 여러 부여족 계열의 나라가 세워졌는데 부여족이 세운 나라로 해모수(解慕漱)가 세운「북부여(北夫餘)」와 해부루와 금와(金蛙)가 세운 「동부여(東夫餘)」그리고 추모왕(주몽)이 세운 「졸본부여(卒本夫餘)」로 알려져 있다.

부여를 건국한 인물은 고리국에서 나온 동명왕이다. 기원전 3세기부터 494년까지 700년 이상 존속한 예맥계 부여족(夫餘族)의 부족 국가로서, 일명 북부여라고도 한다. 부여의 영토는 지금의 창춘 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 성, 북쪽으로는 아무르 강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였고, 은력(殷曆, 은나라 역법)을 사용하였으며, 궁궐 · 성책 · 창고 · 감옥 등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가졌었다. 신분계급은 왕과 그 밑에 마가(馬加) · 우가(牛加) · 저가(猪加) · 구가(狗加) 등 4가(四加)와 대사(大使) · 사자(使者) 등의 지배층, 그 밑에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농노 · 노예로 구성된 피지배 계급의 둘로 나뉘었다. 이른바 4가는 부여 전국을 4등분한 사출도(四出道)를 각기 맡아 다스렸는데, 국도(國都)만은 왕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다. 즉 4가는 국왕의 통솔을 받지만, 4출도에서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들을 영솔해 마치 영주(領主)와 영읍(領邑)의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적의 침구가 있을 때는 4가가 친히 출전하고, 하호는 모두 군량을 부담했는데, 특히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가 실시된 듯 집집이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인접 고구려와 자주 투쟁이 있었으나 원래 그들은 경제적으로 호조건을 구비하였기 때문에 평화를 사랑했다. 기원후 49년 부여는 중원에 있는 국가에 사신을 보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혼인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부여는 국력이 강하여 선대부터 한 번도 패하지 않았고, 한나라 이래로 동쪽의 읍루(숙신)를 신하로서 복속시키고 있었다. 또한, 위(魏)의 고구려 정벌에 부여는 군량을 제공하였고, 부여가 선비족의 침입으로 위태로울 때 진(晋)은 부여를 재흥케 하였다. 그러나 진의 세력이 북방 민족에게 쫓겨져 남쪽으로 천도하면서 부여는 국제적인 고립상태에 빠졌다. 285년(고구려 서천왕 16년)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에게 공격을 받아 북옥저로 도망하였다가 후에 다시 본국을 회복하기는 하였으나(이때 북옥저 지역에 일부가 남아 동부여를 형성했다.), 346년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에게 공격을 받아 쇠약해졌으며, 이후 고구려의 보호를 받다가 494년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부여는 일찍부터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데, 《산해경》의 기사 외에 복생의 《상서대전》(尙書大典)에는 “武王克商 海東諸夷‘夫餘’之屬 皆通道焉”이라 하고, 《사기》에서 열전 화식편 오씨과(烏氏倮) 조에 진시황 때 오씨현 상인 과(倮)와 거래하던 상인 가운데 부여 사람이 나온다.[17][18]사기》 〈화식전〉(貨殖傳)에는 ‘夫燕 …… 北隣烏桓·夫餘’ [19]라 하였다. 여기서 연은 중국 전국시대의 연(燕)이기 때문에 연이 (秦)에 의하여 멸망하였던 기원전 222년 이전에 연과 부여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것이 된다. 즉, 부여는 기원전 222년 이전에 건국되어 고조선과 더불어 중국에 알려질 정도의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挹婁,古肅慎之國也。... 自漢興以後 臣屬‘夫餘’”(읍루는 옛부터 숙신의 나라이다. ... 한나라가 흥한 이후, 부여에 신하로서 복속했다.)[20]라고 기록된 바, 여기서 한은 후한(後漢, 23~220년)이 아니라, 전한(前漢, 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이다. 따라서, 부여는 전한 대부터 동쪽의 읍루(숙신)를 복속시키고 있을 정도로 국력도 강하였다.[21][22] 그리고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도 ‘北隙烏丸·夫餘’ [23]라는 기사가 보인다. 부여는 늦어도 1세기 초의 후한(後漢) 대(代)에는 왕호를 쓰는 연맹 왕국으로 성장하였다고 보인다.[24][25]

부여는 맥족(貊族)이 고조선 즉, 예인(濊人)의 나라에 건국한 국가란 설[26]과 예(濊)의 일부가 맥(貊)에 흡수되어 만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예맥족(濊貊族)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설[27]이 있다.[28]

 

요하 지역에 기반 두고 시작된 자

子성

姓 왕실

 

나라는 

맥족貊族으로 생각되고, 망할 때, 

商왕족인 30대 왕 제을帝乙 첫째 아들이자 상 마지막 31대 왕 제신帝辛 큰 형인 

미자微子 계啓,  기자箕 서여胥餘는 미자 계의 삼촌이다. 서여胥餘는 자기 혈족인 기씨

를 이끌고 箕지역에서 요하로 이동했고, 미자微子 계啓는 주 나라 삼감의 난, 반란 진압 참가한 공으로 중원 남쪽 송나라에 왕으로 봉해졌으며, 분자인류학 논단 유전자 관련 내용을 보면, 한국계로 생각되는 유전자가 중원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는 내용 있습니다. 기자조선=맥족貊族 BC1122년 요하지역에 먼저 자리 잡았고, 부여는 예족濊은 BC500년 경 쑹화강 유역 고리국에 뿌리가 있고, 요하 동쪽 산악 지역에 역사적 근거 있습니다.

맥족貊族, 맥貊북방종족 뜻으로, 중원 하나라 입장에서 보면 상나라는 북방종족이 될 수 있고, 예족濊族, 예濊흐릴 뜻으로 산동성 태산 밑에 있던, 하나라 관점에서 동이족 일 수 있는 것이, 탕왕이 하나라를 멸망시킨 첫 수도가 태산 서쪽 인근 상추시란 점에서, 산동성 태산 지역 동이족이 예족일 가능성 있고, 원래 태산 밑에 있던 문명 사람들은 남쪽으로 이주가 많았지만, 상나라 말기 사람들은 상나라가 500년 이상 지속됐기 때문에, 서쪽 세력인 주나라 상민 이주 정책을 피해서 요하로 이동했을 수도 있고, 그것과 무관하게 상나라 때 만주 요하로 이주 선주민이 됐을 수 있는데, 상왕족인 기자가 요하로 이주하자, 동쪽 길림성 지역이나 한반도로 이주할 수 있고, 길림성 지역은 나중에 쑹화강에서 내려온 부여계와 섞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단군조선 태백산은 산동성 태산일 수도 있습니다. 부여(扶餘)는 여(餘)를 부(扶) 돕는다는 뜻이고, 기자箕子는 성씨, 이름은 서여胥餘입니다. 여(餘)가 일치 된 것이 우연일까요? 부夫사내 여餘로 쓰기도 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지만, 성씨와 국가 흐름을 따라 살펴보면, 나라 이름이 바뀌더라도 공통 문자는 성씨와 국가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고, 그 시대엔 뜻이 없는 음차만 썼다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우연이 반복되는 것은, 부여에서 파생된 국가인 고구려와 고려에서 여(

麗) 역시 음차만 딴 것이라, 연관성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한민족 주족, 객족 논리를 수용하려면, 한국인 50%이상 유전자 비중 있는 혈통 있어야 되는데, 없고, 크게 6개 혈통이 섞여 있기 때문에, 고대국가 혈통 경계선 확실하게 나눌 순 없습니다. 다양한 가능성을 폭넓게 수용 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문정(文丁)은 상나라의 29대 군주이다. 태정(太丁)으로도 불리고 이름은 탁(托)이고, 제을, 비간, 기자의 아버지이다.

 

미자微子 계啓는 제을의 아들이고, 제신의 서형이다.

처음에 미(微)나라에 봉해졌는데 정치를 현능하게 하니 백성들에게 인정받고 받들어졌다. 상나라가 혼란하여 장차 망하게 되니 미자는 여러 번 직접 제신에게 가서 간언하였으나 제신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사(太師) 기자와 소사(少師) 비간과 모의하였는데, 기자가 깨우쳐 말하기를 "정성을 다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으나 죽어도 끝내 그렇게 될 수 없으니 떠나감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이에 제신에게서 멀리 떠나 미나라로 돌아갔다.

서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미자는 제기들을 들고 무왕의 군문에 가서 차려놓은 다음 육단면박(肉袒面縛)한 뒤에 왼쪽엔 양을 끌고 오른쪽엔 포아풀을 잡았으며 무릎을 꿇어 기어 가면서 문 앞에서 고했다. 이에 무왕이 이를 풀어주고 그의 위치를 이전과 같이 돌려주었다.

주공이 동쪽을 정벌하여 삼감의 난을 평정하고 제신의 아들인 무경을 죽인 후에 주나라 영토를 순수(巡狩)하던 중 서주 성왕의 명을 받아 미자를 송(宋)에 봉했다. 이는 주나라가 상나라의 제사를 끊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작위는 공작으로 하며, 천자의 예악을 제사지내는데 쓸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미자가 마침내 송나라를 세우게 되니, 이는 주나라의 이왕삼각(二王三恪) 중의 하나였다.

 

북부여

  • 삼국사기》에는 부여의 역사가 해부루 왕부터 등장하는데, 솽양에서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나타나 해부루왕을 가섭원으로 옮겨가게 하고,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 칭하며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쓰여 있다.
  • 삼국유사》에는 해모수가 기원전 59년 북부여를 건국하였으며, 해부루가 그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또한 하백의 딸 유화에게서 주몽을 낳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해모수는 삼국사기삼국유사에만 나오는 인물로 정작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에는 고구려 건국 이야기 중에 주몽은 하늘의 아들(천제지자)이자 하백의 외손이라고만 할 뿐, 해모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당대 고구려인들이 직접 새긴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으로 볼 때 해모수는 등장하지 않으므로 실존인물인지조차 알 수 없다.
  • 논형》에는 동명이 탁리국(=고리국)을 탈출하여 부여의 땅에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 부여의 유민들이 외세에 유린되는 부여를 탈출해 옛 북부여의 땅에 두막루(豆莫婁)를 세웠다고 《신당서》(新唐書)에 전해진다.
  • 494년 물길이 북부여를 압박하자 왕실이 고구려에 항복하면서 완전히 멸망하였다.
 

동부여

많은 학자들은 북부여가 고구려의 북쪽에 있었던 부여라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러나 동부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동부여가 나타난 기록으로는 북부여 왕인 해부루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가 변경되었다는 것과, 광개토왕이 410년에 침공했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해부루 왕이 천도한 동부여와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동부여를 같은 국가로 보거나 다르게 보는 등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북부여와 해부루왕의 동부여도 완전 별개의 국가로 보는 설과 부여 영토 내에서의 이동으로 보는 설이 있다. 북부여와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동부여를 각각 별개의 나라로 상정하여 주장을 펴는 견해가 다수이나, 북부여와 해부루왕의 동부여를 동일한 국가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부여는 부여의 왕이었던 해부루가 세웠다고 전하고 있지만,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 2세기까지 번성하던 부여는 3세기 후반에 북방의 유목민들이 중국 대륙으로 대거 남하하던 시기에 이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당해 급격히 쇠약해졌다. 285년의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침공으로 인해 왕 의려가 죽고 수도가 점령당하여 왕실과 주민 다수가 두만강 하류에 있던 북옥저로 도피하게 되었다. 이듬해 그 다음 왕 의라가 서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회복해 귀환했는데, 그 중 일부가 북옥저 지역에 계속 살았다. 이렇게 되어 본래 부여가 있던 곳을 북부여라고 하고, 북옥저 지역에 남은 무리들이 나라를 형성하여 동부여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 121년, 고구려가 후한과 충돌할 때에 부여 왕자 위구태(尉仇台)가 현도성을 침공한 고구려의 군사를 공격하여 현도성을 구원한다. 중국의 《북사》와 《수서》는 눙안에서 이를 오해해 구태가 백제의 시조인 것으로 기록해 시조 구태설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북사》와 《수서》의 오류이다.[17][18]
  • 167년에는 부여왕 부태가 후한 본토와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현도성과의 무역 마찰이 생겨 선비족과 고구려의 묵인 하에 현도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 4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북부여를 장악하자, 본국과 차단된 동부여는 자립하다가 410년에 광개토왕의 고구려에 멸망당했다.

갈사부여

  • 갈사부여(曷思夫餘)는 부여 대소왕의 막내동생인 갈사왕이 갈사수 가에 세운 나라이다. 갈사(曷思) 또는 갈사국(曷思國)이라고도 한다. 서기 22년 건국되었고, 서기 68년 갈사왕의 손자인 도두왕(都頭王)이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바치고 우태(于台)라는 벼슬을 받음으로써 갈사부여는 멸망하고 고구려에 흡수 병합되었다.
 

졸본부여

  • 졸본부여(卒本夫餘)는 《삼국사기》가 기록하는 고구려의 도읍지 명칭이나, 《삼국유사》에서는 도읍지를 졸본이라 칭하고 졸본부여는 그 자리에 세워진 나라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도, 졸본 부여의 왕이 주몽을 사위로 삼아 그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했다는 이설을 적어두고 있다. 〈백제본기〉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이 아예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 이로 보아 졸본부여는 고구려의 전신 국가이거나 고구려의 별칭일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졸본부여는 고주몽이 건국한 기원전 37년의 고구려 이전에 많은 문헌에서 등장하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졸본부여라는 이름은 고구려가 부여계의 국가임을 알 수 있는 증거이다.

남부여

  • 남부여(南夫餘)는 백제 성왕이 새롭게 지정한 국호이다. 이 국호나 건국 신화, 무덤 양식 등을 보면 백제는 부여로부터 갈라져 나왔고 그를 오래도록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두막루

  • 두막루(豆莫婁)는 부여의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가 건국한 나라이다. 스스로 북부여의 후계를 자처했다. 대막루(大莫婁), 대막로(大莫盧), 달말루(達末婁)라고도 부른다. 두막루는 서기 410년경에 건국되어 약 300년간 존재하다가 726년 발해 무왕에게 멸망했다. 두막루의 영토는 발해와 흑수말갈로 양분되었다가 결국 발해로 흡수되었다.
 

정치

부여에는 임금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군주가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새 군주를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군주에게 묻기도 하였다. 이것은 초기 농경사회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황금 가지》에 소개할 정도로 유명한 것이다. 부여의 왕 마여가 이러한 옛 부여의 풍속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당시 부여의 정치체제가 부자(夫子) 상속에 의한 왕위세습제가 이루어질 정도로 왕권이 신장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절대적 왕권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그 당시 부여왕은 공손탁이 부여왕에게 일족(一族)의 딸을 시집보내고 있음에서 부여국 지배의 실권을 쥐고 있는 권력적인 왕으로서의 일면과, 마여가 옛 유풍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데에서 원시적인 왕으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3세기의 부여왕은 권력적이면서도 원초적이라는 상반된 양면성을 가지면서 귀족연합제에 의해 공립(共立)되는 성격이 최고로 강하였다. 그러나 군주가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채,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지배층

부여 사회의 중심적 지배 계급을 형성한 부족장의 칭호인 '~가(加)'는 씨족장·부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구려에서도 사용되었다. 부족장 중에서 가장 유력한 자는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등 가축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는데, 이들은 각기 사출도(四出道)의 하나씩을 주관하였다. 이들 대가(大加)는 왕과 마찬가지로 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 등의 직속 가신(家臣)을 갖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왕과 동질적인 성격을 가진 대가는 군주(君主)인 왕의 세력을 견제하였다. 여러 가(家)는 각자가 무기를 가지고 전쟁에 출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였다. 비록 국내에서는 흰옷에 가죽신을 신었으나 사신으로 외국에 갈 때에는 비단옷과 중국인이 부러워하는 값비싼 털옷을 입었으며, 모자는 금·은으로 꾸미는 사치스런 옷차림을 하였다. 또한 조두(俎頭)라는 고급 밥그릇을 사용하였고, 죽으면 많은 사람을 같이 순장하였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권력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富)의 소유자로서 많은 노예를 소유하였다.

 

(馬)말은 데릴사위 음달(陰闥) 아들, (牛)소는 엄지공주 양달(陽闥) 딸, (猪)는 나와 사돈 맺은 외가(外家) 사람들, (狗)는 자녀 결혼 맺은 새나라 한세대 아홉, 나라는 고조~나, 5세대 부양할 중심 3세대 정육면체 27 퍼즐 부부~부모 공직자들로 이뤄지고, 나라 퍼즐 한세대는 9 아홉으로 나라 몸, 머리 서울과 팔다리 전국팔도 아사달(我査闥) 모계사회 음달 앙달 아사달(我思闥) 양면(綿面)소무구성(所武球姓)된다.

 

즉, 혼담긴 몸 쓸 사람처럼, 나라도 혼사 담긴 정육면체 몸으로 구성된, 24시간42 사돈 맺을 인간(因簡) 이룬다. 단군(檀君)은 그 인간 머리 안에 선 황(凰)새 엄마(嚴麻) 3세대 심신(心新)마음 새 며느리와 헌며느리 태백산(太白山) 45년 동안 나라 통치한 최고 권력자를 뜻한다. 봉(鳳)새며느리 부군 데릴사위 부부, 황(凰)새는 모계사회 정점에선 장모(張母), 황금(黃金 凰錦)의 나라 뜻한다.

 

고리국

  • 부여의 뿌리는 만주 북쪽 지역에 있었던 고리국(槀離國)이다. 《논형(論衡)》과 《위략》 등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는 탁리국(橐離國, 또는 고리국 櫜離國) 출신의 동명왕(東明王)이 엄호수를 건너와 건국한 나라이다. 이러한 부여 건국 설화는 이후 고구려 동명성왕의 건국 설화로 그대로 차용되었다.

한나라

  • 서기 120년에 부여왕의 태자인 위구태가 후한에 사신으로 와서, 후한 안제로부터 인수(印綬)와 금태(金綵)를 받고 돌아갔다. 122년에는 고구려·마한·예맥의 군사가 현도군에 쳐들어 오자, 부여에서 왕자를 보내 구원하도록 하였다.
  • 서기 167년 부여의 부태왕은 2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후한의 현도군을 공격하였다. 현도태수 공손역(公孫琙)이 이를 격퇴하여, 부태왕은 1천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배하였다.
  • 2세기 후반 한나라의 군벌 공손탁은 부여의 왕 위구태에게 종녀(宗女 : 조카딸)을 시집보내 혼인 동맹을 맺었다.

선비족

  • 285년 선비족 모용외(慕容廆)가 부여를 습격하였는데, 부여의 의려왕은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살하였다. 의려왕의 자제들은 옥저로 피신하였고, 부여의 도성은 파괴되고 1만 명의 백성들이 선비족에게 끌려갔다.
  • 286년 의려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부여 의라왕은 서진(西晉)의 동이교위(東夷校尉) 하감(何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감은 독우(督郵) 가침(賈沈)을 파견하여 의라왕을 돕도록 하였는데, 이에 맞서 모용외가 손정(孫丁)을 보내 요격하게 하였다. 가침이 승리하고 손정을 죽이자 선비족의 군사는 물러났으며, 의라왕은 부여를 재탈환하였다.
  • 346년 부여의 현왕은 선비족이 세운 전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전연의 왕 모용황(慕容皝)은 세자인 모용준과 4남인 모용각을 시켜 부여를 공격하고, 현왕과 부여의 백성 5만 명을 전연으로 끌고와 사실상 부여를 멸망시켰다. 모용황은 부여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현왕을 사위로 삼고 진동장군(鎭東將軍)에 임명하였다.

고구려

  • 동부여의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부인을 얻어 주몽을 낳았다. 기원전 37년경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했다.
  • 22년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부여를 침공하여 대소왕이 전사했다. 대소왕의 막내 동생이었던 갈사왕은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예감하고 피난하여 갈사국을 건국했다.
  • 22년 부여 대소왕의 종제(從第, 사촌동생)는 부여 사람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고구려 대무신왕은 대소왕의 종제에게 락씨(絡氏)라는 성을 내리고 부여왕으로 책봉한 후 고구려 연나부(掾那部)에 거주하게 하였다.
  • 494년 고구려 문자명왕 때 부여의 잔왕과 그 처자가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쭉 읽어 본 결과, 단군조선 단국과 부여 고구려는 부계 혈연 상관 관계가 없는 그냥 이웃 관계로 생각됩니다. BC 500년 경 쑹화강 고리국은 요하에서 지리적으로 너무 먼, BC600년 경 확장된 스키타이족, 또는 북방 어딘가에 뿌리가 있는 다른 부족으로 생각됩니다.

요하 주변, 역사 위치
환국, 단국, 상국, 기자조선 주활동무대였던 요하가, 만리장성에 머물렀던 중국이 점령했고, 요하 동쪽 길림성 지역에 있던 단국과 동화 됐던 부여계 반격으로 요동까진 수복되지만, 기자조선 왕족과 대신 일족은 마한까지 밀렸고, 결국 부여계에 멸망, 통합된다.

 

국가가 망하고 새로 세운 연대를 표시하고 보니까, 마한은 176년 동안 존재했는데, 부여 온조가 내려 가서 1년 만에 멸망 시킨 것을 보면, 기자조선 비파형청동검? 세형동검인가? 고구려 철기에 얼마나 취약한지 알 것 같습니다.

 

기箕 +강康 성씨姓

氏는 1,000년 세월을 함께했고, 강씨康氏 족보가 아닌 직계 조상 세보 역할을 하는 상계에서, 마한 기箕족 월지국 왕실이 망할 때 강씨康 42세손 전사가 있었고, 강씨康氏는 신라에서 성골귀족 벼슬을 했는데, 이벌찬 벼슬이 뜨는 시점까지, 4~5대 정도 신라 벼슬로 보이지 않는 관직명이 뜹니다. 백제 벼슬도 아니고, 43세손 아감, 46세손 상장군, 47세손 내주승상, 신라 관직 봤는데 없습니다. 48세손 이벌찬 신라 관직인데, BC17년부터 4대라면, 100년 이상 걸리죠? 40세손이 마한 지사 관직으로, BC57년 신라 박혁거세 임금이 나라를 세웠고, 그 운기, 순환을 살폈다고 써있는 것을 보면, 신라와 교감 어느 정도 있을 것인데, BC17년 왜 신라로 바로 가지 않았을까요? BC17년 기箕족 왕실 족읍만 망하고, 마한 54개국 다른 족읍은 더 오래 유지 됐던 것은 아닌지, 백제가 마한을 완전 점령하는데 100년 넘게 걸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한 54개국이 백제에 밀려 내려가는 과정에서 한반도 벼농사 중국과 다른 

수도경작(水稻耕作)BC300년 경부터, 일본 야요이 시대에 한반도 남부에서 전파됐고, 백제에 밀려 내려가는 과정에서 섬으로 건너간 사람들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본이 백제와 교류한 시기는 AD300년~700년 고훈 시대로, 야요이 시대는 아마도 마한 54개국이 오랫동안 망하는 과정에서 건너간 사람들로 생각됩니다.

 

요하지역은 AD 385년 고구려 고국양왕 때 요동성을 점령, 요하 동쪽까지 수복 됩니다. 광개토대왕 때, 후연과 경쟁 멸망시켰고, 장수왕 때까지, 요서 현재 조양현에 북연이 용성있었지만, 고구려 속국에 불과했고, 북위가 북연을 공격하려 할 때, 고구려에 지원 요청, 북위는 고구려에 겁먹고 돌아갔지만, 고구려는 북연 왕과 백성을 고구려로 잡아간 것을 보면, 요하 전체가 고구려에 수복된 겁니다.

 

마한(馬韓)은 고대 한민족의 54개 부족국가 연맹체이다. 마한은 삼한의 기간(基幹)으로서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그 범위는 한강 유역(경기도)으로부터 충청·전라에 퍼져 있었으며, 목지(目支)[1]·백제(伯濟)[2] 등 54개국이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후에 부여 등 북방계 유이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百濟)국이 마한세력을 통일했다.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소국의 통칭이다. 마한은 서해에 접하고, 동쪽은 진한(辰韓), 남쪽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한강 이남 서울남동부를 중심으로 했던 나라 등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 마한의 54개 부족국가는 지금의 경기도·충청북도·충청남도·전라북도·전라남도에 해당하며, 그 외에도 강원도 서부와 황해도 남부까지 세력권으로 하였다.

마한인은 정주민이며 농업 중심이다. 이와 더불어 마한지역에서는 그 당시 한반도 동남부 변한이나 진한의 초기 철기시대(세형동검문화단계) 유물과 비교해 청동기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다. 이 시대부터 대두되고 있던 선진적인 정치 집단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철기가 유입되기까지 이들은 청동기의 제작과 교역을 통하여 중남부 각지의 세력집단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경기도 고양·용인, 충청남도 부여, 전라남도 영암 등지에서 각종 청동기 거푸집(鎔范)이 발견되어 청동기 제작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마한의 전체 호수(戶數)는 10여만 호였으며,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특히, 목지국(目支國)은 진국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삼한시대에도 목지국의 왕은 진왕(辰王)이라 일컬어 마한과 진한 여러 나라의 맹주대접을 받았으며, 삼한의 초기에는 그 세력이 진한과 변한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은 총 호수가 4~5만인데, 큰 나라는 4~5천 호였고, 작은 나라는 6~7백 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중 북방에서 이주해온 부여족(扶餘族)계통인 온조(溫祚)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했고 4세기 중엽(백제 근초고왕 재위기)이 마한 연맹체를 통일했다.

 

랴오닝성 요하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단국과 그이전 국가 환국

위서(조작된 역사서) 속의 환인

환인(因)은 신화 상의 신격(神格) 인물로 환웅의 아버지로 전해진다. ‘단인(因)’이라고도 한다. 한민족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 등장하며 환웅이 인간세상으로 내려가 세상을 다스릴 것을 허락하고 천부인 3개를 주었다고 한다.

환단고기》에는 환인이 신격과 인격을 동시에 가지는 존재로 그려진다. 신에 가까운 면모를 보이지만 동시에 환국이라는 나라의 군주로도 나타나며, 7대에 이르는 역대 환인이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는 환인의 표기를 일반적인 역사서와 달리 하고 있는데, 桓因과 桓仁의 두 가지로 사용하고 있다.[10] 한편 《규원사화》의 〈조판기〉에도 환인이 등장하는데,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면서 다수의 작은 신(小神)을 거느리고, 환웅에게 명을 내리는 존재로서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서, ‘환(桓)’은 밝은 빛으로 그 모양을 본떴다고 하며, ‘인(因)’은 만물이 그로부터 생겨났음을 의미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또한 조선 중기 조여적이 지은 선가서(仙家書) 《청학집(靑鶴集)》에는 신라인들환인(桓仁)을 동방 최초의 선도(仙道)의 조사(祖師)이며 진인(眞人)이라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11]

그러나 일반적으로 《청학집》과 같이 후대에 찬술된 도가의 문헌은 선대의 유명인을 견강부회하여 서술하는 경향이 많아 신뢰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으며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등의 서적 역시 후대에 조작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12]

 

환인(桓)과 환국(桓國)=환은 씨족을 지칭, 은 씨족 지도자를 꾸미는 형용사, 국

은 나라를 뜻하는데, BC1600~BC1122년 상商나라까진 현대 국가 개념과 다른, 씨족 혈족 형태 족읍국가=촌장, 주나라 이후 부터 중국을 분할 주족 친족들을 왕으로 낙하산 임명, 다른 씨족이 다스리는 국가가 됐다. 따라서, 아래에 그게 국가냐? 아니냐 여부로 환인을 환국으로 쓴 것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삼국유사》 판본 가운데 조선 중종때 나온 〈정덕임신본〉 에는, 환인(桓因)이 환국(桓囯)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로 인해 조선 중기 이후의 사찬 역사서들 중 일부에 단군신화의 해당 구절이 ‘환국(桓國)’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불승들이 환국을 환인이라 조작하였다는 주장이 등장하고, 1965년 문정창이라는 재야사학자에 의해 재조명받으며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날조한 것’이라 주장되었다. 하지만 〈정덕임신본〉의 환국(桓囯) 표기는 오각(목판을 만드는 사람이 실수로 잘못 판 것)임이 확인되어 현재는 환국의 존재를 인정하는 국사학자는 없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아직도 조작설을 주장하고 있다.[13]

 

환인현(仁縣)은 고구려의 첫 도읍이었던 졸본성(卒本城)이 위치하던 곳이다. 이곳에 있는 오녀산성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장소인 홀본성(忽本城) 또는 졸본성(卒本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발해가 건국된 후에는 환주(桓州)로 불렸다. 환인은 청나라 강희제 이후 봉금지가 되었다가, 19세기 후반에 회인현이 설치되어 그 관할지역이 되었다. 중화민국 건국 후에는 환인현이 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는 민족구역자치 정책에 따라 민족자치현이 되었다.

 

환인현(仁縣)은 고구려의 첫 도읍이었던 졸본성(卒本城)이 위치하던 곳이다. 이곳에 있는 오녀산성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장소인 홀본성(忽本城) 또는 졸본성(卒本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발해가 건국된 후에는 환주(桓州)로 불렸다. 환인은 청나라 강희제 이후 봉금지가 되었다가, 19세기 후반에 회인현이 설치되어 그 관할지역이 되었다. 중화민국 건국 후에는 환인현이 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는 민족구역자치 정책에 따라 민족자치현이 되었다.

 

환인현 위치, 홍산문화 샤자뎬? 하층문화 단국 위치

환인현 위치, 홍산문화 샤자뎬? 하층문화 단국 위치
요하 지역 주요 지명 유물 우치, 홍산문화 유적 요하 서쪽 상류에 있다. 평양 왕검성 초기 요동성, 후기 현재 평양에 있다. 환국 추정 환인현, 한반도 밖,랴오닝성 동쪽 산악지형에 있다. 지린성은 부여계 활동 영역이다.

 

지도에서 보면 부여는 현도군 보다 북쪽 지역에 있었고, 고구려현=환인현(仁縣)=오녀산성 있는 환국(桓國) 발생지역으로 생각되고, 단국은 그곳에서 요하 지역 어디선가 시작됐는데, 시작된 지역 특징은 박달나무 단, 신단수는 가침박달나무 숲이 무성한 지역으로 생각되는, 랴오닝성과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주로 서식한다고 나옵니다.

가침박달나무 꽃
박달나무 단檀 단국檀國 이름이 왜 박달 나무로 지었을까? 의문인데, 꽃을 보니 알 것 같다.붉은 색도 있다. 신단수神壇樹=박달나무 꽃이 무성한 숲에 사는 토착 호족을 신으로 묘사한 것.

 

빗살무늬토기 시대 ( ── 土器時代) 또는 즐문토기 시대(櫛文土器時代, Jeulmun pottery period)는 한반도의 고고학적인 시대 구분으로 기원전 8000년부터 기원전 1500년에 이른다. 이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로, 전기에서 중기에 걸친 토기에 빗살과 같은 모양의 무늬가 발견되어 이것을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

 
민무늬토기 시대 (無文土器時代, Mumun pottery period)는 한반도의 고고학적인 시대구분이다.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전 300년경에 이른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토기가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특징으로 인해 민무늬 토기 문화라고 명명되었다.
 

비파형동검 

(琵琶形銅劍,  Lute-shaped Bronze Dagger)은 청동기 시대의 칼의 일종으로 만주에서 한반도, 랴오닝성에 걸쳐 출토되고 있는 동검이다. 가장 오래된 것기원 전 10세기 무렵에 랴오닝 지방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것은 기원전 7세기 전후이다. 비파형동검은 지배 계층과 집단의 출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고조선과 동호의 표지 유물 가운데 하나로 추측된다.

비파형 청동검
고조선과 동호의 표지 유물, 동호와 무관, 그들은 빈 지역에 잠시 머물러 교류했을 뿐이다.

 

 

랴오닝성 차오양(朝陽, 朝阳) 쓰얼타이잉즈(十二台營子)에서 한반도 세형동검과 잔무늬거울의 조형(祖形)으로 보이는 비파형동검과 거친무늬거울(粗文鏡)이 출토되고 제작시기가 앞선 문화로 확인되면서 경기도 광주, 충청남도 부여 송국리 유적 등 한반도 여러 곳에서 비파형동검발견과 함께 명실공히 중국 세형동검에 앞서는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동검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한 요령지방(遼寧地方, 랴오닝)에 주로 분포하기 때문에 요령식(랴오닝식) 동검이라고도 하며, 일제강점기에는 만주식 동검으로 불렸다. 학자에 따라서는 부여 송국리에서 출토된 예에 따라 부여식 동검이라고도 하며, 형태에 따라 곡인청동단검(曲刃靑銅短劍)으로 부르기도 한다. 고조선을 상징하는 유물이라고 하여, 고조선식동검(古朝鮮式銅劍)이라 부르기도 한다. 비파형동검은 검날과 검자루가 따로 만들어져 조립식이고 검날의 중앙에서 잘록한 돌기를 이루고 하단에서 둥글게 벌어져 비파 형태를 띤다. 검신의 중앙에는 등뼈처럼 도드라진 마디가 있는데, 이는 다른 동검과 명백하게 구분되는 비파형동검만의 특징이다. 중국의 동주식동검(東周式銅劍)과는 명백하게 구분되는 문화권을 이루고 있으며 대체로 예맥(穢貊) 계통의 문화권을 표지하는 유물로 이해된다.

 

*청주한씨 청주는 부여와 광주 사이에 있다.

 

세형동검 (細形銅劍)은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동검이다. 한국, 일본, 연해주에서 발견된다. 기원전 300년 이후에서 기원 전후에 걸친 초기 철기시대를 대표하는 표지 유물 중 하나이다.

세형동검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동검 백제 온조는 고구려에서 파생됐고, 철기 기술을 함께 갖고 왔다.

 

부여(扶餘, 기원전 3세기 ~ 494년)는 한국의 고대국가인 초기 국가(연맹 왕국)들 중 하나로,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하얼빈아청위수눙안창춘솽양지린옌지훈춘치치하얼룽장)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부여는 멸망하였다.

단군조선이 기원전 194년에 멸망으로 해체되면서 여러 부여족 계열의 나라가 세워졌는데 부여족이 세운 나라로 해모수(解慕漱)가 세운「북부여(北夫餘)」와 해부루와 금와(金蛙)가 세운 「동부여(東夫餘)」그리고 추모왕(주몽)이 세운 「졸본부여(卒本夫餘)」로 알려져 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제30

부여전(夫餘傳)

부여는 만리장성 이북의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으로 고구려, 동으로 읍루, 서로 선비와 접하며, 북으로 약수가 있다. 둘레가 가히 이천 리다. 가구는 팔만이다. 그 주민들은 토착민이다. 궁실과 창고와 감옥이 있다. 산, 언덕, 큰 못이 많다. 동이(東夷) 땅 중에서 가장 평평하고 탁 트였다. 토지가 오곡(五穀)에 적합하나, 오과(五果)는 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거칠고 (덩치가) 크다. 성품은 강하고 용감하며 조심스럽고 중후하다. 약탈하지도 노략질하지도 않는다. 나라에는 임금이 있다. 모두 여섯 종류의 짐승 이름으로 벼슬아치 이름을 삼는다.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豬加)‧구가(狗加)‧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가 있다. 읍락[50]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신분이 낮은 백성들은 모두 머슴이라고 부른다. 제가(諸加)들은 각자 사출도(四出道)를 맡는다. 큰 구역〔道大〕을 맡은 이는 수천 집을 다스리고 작은 구역을 맡은 이는 수백 집을 다스린다. 음식을 먹을 때는 모두 제기(祭器)를 사용한다. 모이면 술잔에 절하고 술잔을 씻고 서로 절하고 사양하면서 (술잔을) 들었다 놨다 한다. 은(殷)나라 정월달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데 나라 가운데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며칠 동안 계속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춘다. 이를 영고(迎鼓)라 부른다. 이때는 벌 내리는 것을 그치고 죄수들〔囚徒〕을 풀어준다. 그 나라에서는 흰 옷을 숭상한다. 흰 베로 넓은 소매, 도포, 바지를 만들고, 가죽 신발을 신는다. 나라 밖으로 나가면 비단 옷과 비단 방석을 높이 친다. 지체 높은 사람들〔大人〕은 여우, 삵, 흰원숭이, 검은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덧대 입고, 금과 은으로 모자를 꾸민다. 통역자가 말을 전할 때는 모두 무릎을 꿇고 손으로 땅을 짚고 조용히 말한다. 형벌을 집행할 때는 엄격하고 신속하게 한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 사람들은 잡아들여 노비로 만든다. 물건을 훔치면 하나에 대해 열두 배로 갚게 한다. 음탕한 남녀와 시샘하는 여자는 모두 죽인다. 시샘하는 것을 특히 싫어하여 (시샘하는 여자가) 이미 죽었어도 나라 남쪽의 산 위에 송장을 버리고 썩도록 내버려둔다. 여자 집에서 (송장을) 거두려 하면 소와 말을 가져가야 송장을 내준다. 형이 죽으면 (동생은)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이는) 흉노와 같은 풍속이다. 그 나라는 가축〔牲〕을 잘 기른다. 훌륭한 말·붉은 옥·담비·원숭이·영롱한 구슬이 난다. 구슬이 큰 것은 멧대추 만하다. 무기로는 활·화살·칼·창이 있다.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 있다. 그 나라의 늙은이들은 자신들을 "옛날에 도망친 사람"이라고 일컫는다. 성(城)과 목책〔柵〕은 모두 둥글게 만든다. (생김새가) 감옥과 흡사하다. 길을 갈 때는 밤낮으로 늙은이, 젊은이 구별없이 모두 노래 부르니 하루종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싸움〔軍事〕이 있을 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소를 잡아 발굽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져 있으면 나쁜것으로 여기고 발굽이 붙어 있으면 좋은 것으로 여긴다. 적이 있거든 뭇 우두머리들〔諸加〕은 자진해서 싸우러 간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모두 양식을 짊어지고 가서 병사들을 먹인다. 사람이 죽으면 여름철에는 모두 얼음을 쓴다. 사람을 죽여 순장(徇葬)하는데 많게는 백여 명에 이른다. 장례〔葬〕를 성대히 치를 때는 관(棺)을 쓰지 않고 덧널무덤〔槨〕을 쓴다. 위략(魏略)에서 이르기를, 그 나라 풍속에 다섯 달 동안 〔주검을 묻지 않고〕 상(喪)을 멈춘다. (이 기간이) 길면 길수록 훌륭하다 여긴다. 죽은이를 제사 지낼 때는 (음식으로) 날 것도 쓰고 익힌 것도 쓴다. 상주(喪主)는 상(喪)을 서두르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독촉한다. 늘 밀고 당기며 다투는데 이를 예의〔節〕로 여긴다. 상(喪)을 치를때 남녀 모두 순백(純白)의 옷을 입는다. 여자들은 베로 짠 얼굴 가리개를 한다. 가락지와 노리개는 버린다. 대체로 중국(의 풍속)과 서로 비슷하다.

부여는 본래 현도군[51]에 속한다. 한말(漢末), 공손탁[52]이 해동에서 세력을 키워서 외이(外夷)를 위엄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53]는 (소속을) 바꾸어 요동군[54]에 복속했다. 이 때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여 공손탁은 부여가 이들 두 나라 사이에 끼여 있음을 보고 왕실의 딸을 위구태 왕에게 시집보내었다. 위구태왕이 죽자, 간위거[55]가 왕이 되었다. 간위거는 적자가 없고, 서자인 마여[56]가 있었다. 위거가 죽자 제가(諸加)들이 함께 마여를 왕으로 세웠다. 우가(牛加)[57]의 형의 아들 이름도 위거(位居)인데, 대사(大使)가 되어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잘 베푸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해마다 (위나라)[58] 수도 (낙양)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정시(始中)[59] 년간에 유주자사인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면서 현도 태수 왕기를 부여에 보냈고, 위거는 견사를 보내어 교외에서 (왕기를) 맞게 하고, 군량을 보내었다. (위거의)[60] 계부인 우가가 딴 마음을 품자, 위거는 계부 부자 (즉, 우가와 위거)를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몰수하여 사신을 보내어 재산 목록을 만들어 관청에 보내었다. 옛 부여의 풍속에 장마와 가뭄이 연이어 오곡이 익지 않을 때 그때마다 왕에게 허물을 돌려서 혹은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혹은 ‘왕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하였다. 마여가 죽고, 그의 아들 의려(依慮)[61]가 여섯살로 왕이 되었다. 한 나라 때, 부여왕 장례에는 옥갑(玉匣)을 사용하였는데, 상시 현토군 부근에 예비해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곧 헤아려 취하고 장례에 사용하였다. 공손연[62]이 형벌을 받아 죽었어도, 현토군의 창고에는 옥갑 일구(一具)가 남아 있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으로 만든 벽(璧)·규·찬과 같이 수대에 걸쳐 전해 내려와 보물로 여겨지는 것이 있는데, 노인들이 말씀하시기를, 선대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라 하였다. 위략에 이르기를, 그 나라는 국력이 강하여 선대부터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 인장의 문구에 말하기를 ‘예왕의 인장’이라 하고, 나라에는 ‘예성’이라는 옛 성이 있으니, 생각건대 본래 예맥의 땅이기 때문이다. 부여가 그 중에 왕이므로, 스스로를 ‘망명한 자’라 일컫는 것은 아마도 그래서인 것 같다. 위략에 이르기를, 옛 기록이 또 이렇게 말한다. 일찍이, 북쪽에 고리의 나라가 있었다. 그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자, 왕은 그를 죽이려 하였다. 시녀가 말하기를, “달걀과 같은 기운이 내려와 제가 아이를 밴 것 같사옵니다.” 하였다. 뒤에 아이를 낳자, 왕이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가 입으로 입김을 불어주었다. 마굿간으로 옮기자 말이 입김을 불어넣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천자(天子)가 아닐지 괴이하게 여기고는, 이에 그 어미에게 거두어 그를 기르게 명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불렀다. 언제나 말을 기르게 명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그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웠기에 그를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施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가 되어, 동명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이내 흩어졌으므로 쫓던 병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동명이 이로 인하여 부여(夫餘)의 땅을 도읍으로 삼아 왕이 되었다.

 

위키를 보면, 중국 전설로 생각되는 삼황오제 시기까지 중국의 역사 표시하면서, 한국의 역사 표시는 단기(檀紀) 4352년 오랫동안 쓰던 달력이 존재하는데도, 환국桓國 끝부터 시작되는 단국을 표시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인의 이중성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예濊맥貊에서 맥貊은 기씨족箕氏族을 중심으로 하는 주周나라 상민商民정책을 피해 추가 이주한 

나라 씨족으로 이루어진 부족族으로, 쑹화강에서 내려온 부여계를 통칭하는 것 같고, 예濊는 산동성 태산 근처에 있던 동이족이 요하에 선주했다가 상나라 왕족 기자 이주로 한반도로 유입, 3개 혈통이 문명 공동체 고조선을 형성한 것으로 보이는, BC1122년~BC300년 활동 반경 요하 왕검성 평양을 중심으로 한 만주와 한반도 전 지역, 연나라 진개 침공 BC300년~BC194년 평양 주변 한반도 북부 일대, BC194년 위만 반란~평양 왕검성을 잃었고, 기씨족箕은 남하기성한씨箕姓韓氏가 됐고, 대신 씨족들과 마한馬韓을 이뤘다. 동쪽 지역 예濊 부족은 동예東濊를 세웠다. 마한은 부여계 백제 온조에 멸망했고, 동예는 부여계 고려高麗(고구려)에 통합됐다.

 

맥(貊)북방종족 한자모양은, 나라 양달(陽闥30) 정사각형(井口脚兄) 엄지(嚴地) 네곳에 부임한 공주(共周), 나라 머리 큰 엄마 황(凰)새 서백(西白)으로 설(說) 내가(內可) 백설공주(白楔功主)와 사돈 맺은 외가(外家) 음달(陰闥29)에서 데려올 친구 아들 데릴 사위, 시(豕)돼지에 올 시(豺)승냥이가 설 새나라 닭벼슬은 사위(査位), 요즘 말로 시골에서 올라온 촌놈, 개천에서 용나는 것이 북방계 남자들 결혼, 팔다리 노릇할 저승돼지가 나라 머리로 올라선 생각할 돼지가 멧돼지, 한국 말소리에 주목할 필요있다.

 

맥 = 매+ㄱ, ㄱ은 현재 나라 이룩한 과거 선조 약속 뜻. 소리(音) 매는 맺을 사돈 뜻.

매매(買살 4 賣팔 8) 한국말소리 음 한자 모양 훈(訓)가르칠, 담겨있는 숫자가 있다.

4와 8은 무슨 뜻? 정오(正午)는 이세상 지구(地球) 양달(陽闥30) 머리를 뜻하고, 나라 구(口)입 머리는 사돈 맺은 네모, 어미넷으로 머리 구성된다. 매(買)살, 그 어미 넷 엄지공주와 함께 살, 패(貝)조개=한패거리  명(皿)그릇 가족, 목(目)눈 어미와 서로 다를 손발로 매(買)살 한자 모양 이뤄져있다. 매(賣)팔 = 손가락 4+ 발가락 4=8, 우물 팔, 우물 파서 떠낸 물이(物二) 자녀, 딸 소, 아들 말, 상품(商品) 아래 있는 ㅁㅁ=서로 다를 두 큰어미 나라 사이에 끼일 ㅁ 새나라 바탕위에 선다. 그 나라 네모를 이룰 정사각형이 우물 한자 모양에 있는데, 가족끼리 결혼하지 않기 때문에, 곤(丨)뚫을 곧게 선 위도선남 나무 아닌, 별(丿)다를 음달에서 데려올 데릴 사위 뜻 모양 쓴 것이 정(井)우물 한자 모양이다. 정오(正午) 낮 12시간 양달(陽闥)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정오, 한자가 핵심일까, 한국 말소리가 핵심일까? 한국 말소리가 핵심 기본 뜻, 한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같은 소리에 담겨있는 기본 뜻에서 파생된 상세한 뜻 전하는 편지(片志)다. 즉 맥이란? 나와 겨뤄 진 너와 내가를 이룰 결혼, 사돈 맺는 것이다. 한자는 중국 글자가 될 수 없다.

 

맥貊=부여扶餘로 생각되고, 부여 계통은 기원전600~500년 전후해서 쑹화강 유역 고리국에 뿌리가 있는, 주로 길림성 일대와 헤이룽장성 활동 반경, 기자와 교류하는 혈통으로 단국 아래 교류하는 공동체인 것은, 연나라 진개 침공후 형성된 부여扶餘가 북동쪽에 있던 숙신(肅愼)이 머리를 땋는 편발編髮을 하고, 겨울엔 동굴 생활, 여름엔 나무위에서 생활하며, 문자가 없던 숙신=여진=만주족과 달리, 맥貊 부족

부여扶餘가 나라 달력을 썼다는 것입니다. 상나라 왕족 기자조선과 문명 공동체가 틀림없고, 맥貊 부족부여扶餘는 BC300년 경 연나라 진개 침공 후부터, 요하를 잃은 기자조선 왕실과 지리적 단절되면서, 3 부여扶餘와 옥저를 형성했고, 졸본 부여扶餘 맥貊 부족族 계통인 고려高麗(고구려)는 한漢 4군현과 요하를 포함한 동북 3성과 숙신, 요하 경계 내몽골 지역까지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때 환국 고조선 지역을 완전 수복 했고, 맥貊 부족族 계통인 고려高麗(고구려)에서 파생된 백제百濟 온조溫祚가 BC 18년 남하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1년 만에 마한 54개국 연맹체 수장인 목지국目支國(=기씨족箕은 남하 기성한씨箕姓韓氏)을 멸망시켰고, 4세기초 마한을 완전히 통합했습니다. 

예濊족은 동예 위치를 고려하면, 산동성 동이족이 만주 요하로 이동했다가, 상나라 왕족인 기자가 이주하면서, 자리를 한반도로 옮긴듯하고, 연나라 진개 요하 침공에 기씨왕실이 평양으로 이동하면서 동쪽으로 이동, 위만조선에 기자조선이 망하면서 동예를 세운, 고조선은 적어도 3~4개 주요 혈통으로 구성된 연합체로 생각됩니다.

 

단국=상국=기자 예족 계통 왕실이 망했고, 고구려 백제 신라, 부여 계통 왕실이 번창하면서, 한국인 다수 DNA를 형성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분명한 것은, 우리 민족 발상지는 요하 랴오닝성 지역+길림성 동북 3성 지역이고, 중국을 500년 동안 통치했던 상나라 기자와 유민은 본향인 평양=요하로 돌아 왔다는 것, 그 후예들은 위만에 망하면서 마한을 세우면서 남쪽에 뿌리를 내렸고, 백제 온조에 망했다 해도, 호족들은 지역에 뿌리를 내리면서 토착 호족으로 성씨 혈통을 이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인 전체 인구에선 소수겠지만, 상나라와 기자조선이 한국사에 편입되면, 단국 역사는 한혜진 기성용까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

 

훙산 문화(홍산 문화, 중국어 간체자: 红山文化, 정체자: 紅山文化, 병음: hóngshān wénhuà)는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요령성일대에 존재했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이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네이멍구 자치구 츠펑 시 랴오닝 성 조양 시 일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큰 특징인 옥기(玉器)는 한반도 강원도 고성군 패총에서 출토된 옥 귀걸이(7천 년 전)와 전남 여수 안도리(6천 년 전)등등에서 발견된 옥 장신구, 귀걸이와 유사점이 있어 고조선 등 한반도 초기 역사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1] 실제로 한반도 신석기시대에 출토되는 옥기는 주로 결상이식, 수옥, 비상옥기, 반월형옥기 등이며, 홍산문화의 동물형 옥기는 출토되지 않는다. 홍산문화는 기원전 4,500 ~ 기원전 3,300년에 존재했으며, 고성 문암리에서 결상이식이 출토되는 시간은 기원전 5,300 ~ 기원전 5,000년이다. 연대로 보아 후자가 이르기 때문에 홍산문화에서 영향받은 고성 문암리 결상이식은 성립될 수 없다. 양 지역의 관련성 검토를 위해서는 토기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다. 아무리 특정유물이 유사하더라도 뒷받침되는 토기양상에 차이가 있다면 같은 계통이나 문화권으로 주장하기는 것은 무리이다.[2]

 

홍산문화는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는데, 연대는 기원전 4700년 ~ 기원전 2900년 경으로 지금까지 츠펑(赤峰, 발견 당시엔 열하성), 링위안(凌源), 젠핑(建平), 차오양(朝陽) 등 500여곳의 유적을 찾아내어 발견 지역은 옌산 산맥의 북쪽 랴오허 지류의 서 랴오허 상류 부근에 널리 퍼져 있다. 중국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하면서 싱룽와 문화(興隆窪文化), 훙산 문화, 자오바오거우 문화(趙寶溝文化), 신러 문화(新樂遺跡)등의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 문화(culture)의 단계를 넘어선 새로운 문명(civilization)으로 간주하여 '요하문명'으로 명명하여 부르고 있으나, 중국 외의 국가에서는 문명 단계에 이르지 못한 문화로만 인정받고 있다.[3][4][5][6][7]

신석기/청동기 요령지역 문화와 주요 유적

형성시기 한글 한자 위치
기원전 8000년 ~ 기원전 7000년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신낙 문화 유적(모계씨족의 정주 취락) 新樂 文化(신러) 랴오닝성 선양 시 북부 지역
기원전 7000년 ~ 기원전 6500년 신석기시대 소하서 문화 유적 小河西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지역
기원전 6200년 ~ 기원전 5200년 신석기시대 흥륭와 문화 유적 興隆洼 文化(싱룽와)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지역
기원전 6000년 ~ 기원전 5200년 신석기시대 사해 문화 유적 査海 文化 내몽골 접경 사해 유역
기원전 5200년 ~ 기원전 5000년 신석기시대 부하 문화 유적 富河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부하 유역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4400년 신석기시대 자오바오거우 문화 유적 趙宝溝文化(자오바오거우) 내몽골 난하 계곡과 허베이 성 북부
기원전 4500년 ~ 기원전 3000년 신석기시대 훙산 문화 유적 紅山文化(훙산) 내몽골 요동 하북 지방
기원전 3000년 ~ 기원전 2000년 동석병용시대(銅石倂用時代) 소하연 문화 유적 小河沿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소하연 유역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1500년 초기 청동기시대 하가점 하층 문화 유적 夏家店 下層 文化 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맹극하(孟克河) 유역

연대 인상과 평가

중국에서는 요하 유역에서 새로운 유적들이 계속 발견됨에 따라 도리이 류조의 처음 발견 당시의 추정보다 연대가 훨씬 오래된 기원전 8000년까지 인상되었다면서, 광의의 홍산 문화에 기원전 8000년경의 신러 문화까지를 포함시켜 '요하 문명'으로 간주하여 홍산 문화가 황하문명의 원류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으나, 이러한 평가가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위치

내몽골자치구 츠펑 시에는 붉은 기운이 도는 홍산이 있다. 이 곳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옥기가 발견돼 홍산옥기(紅山玉器)라 하였고 중국 중원에서 보기에 홍산 뒤쪽에서 발견되었기에 내몽고 자치구 츠펑 시에 있는 홍산 호우(红山 後, 홍산 후) 유적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동남부, 랴오닝 성 서부와 중부,동부에 해당된다.[3][4][5]

역사

현재의 명칭은 내몽고 자치구 츠펑 시에 있는 홍산 호우(红山 後, 홍산 후) 유적에서 유래하였다. 홍산문화는 190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저명한 인류학자 겸 고고학자인 도리이 류조가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우연찮게 많은 신석기 유적과 돌로 쌓은 묘(적석묘) 등을 발견한 것. 이것이 후대 세계를 놀라게 한 홍산문화 적석총 유적이다.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였다.

하지만 당대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후 20세기 초 중국에 온 프랑스 예수회 신부 에밀 리상(Emile Licent·1876~ 1952)도 22곳의 신석기 유적을 발견했지만 류조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글만 남겼다. 그러나 1920년대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중이던 고고학도 양사영(梁思永·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은 이 글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1930년 귀국한 양사영은 그해 겨울에 적봉으로 향했다. 중국 중앙연구원 고고분과 담당자로서 내몽골 임서 일대와 흑룡강 등 동북지방에서 잇따른 신석기 유적 발견을 바탕으로 본격적 발굴작업을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정세불안과 건강 악화로 발굴이 지연되다 1934년 ‘열하고고보고(熱河考古報告)’로 학계에 첫 보고를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보고서엔 “동북 4성(요녕·길림·흑룡·열하성) 발굴작업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썼다. 이것이 오늘날 동북공정은 중국인 양사영으로부터 시작된 격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발굴은 일본 고고학의 아버지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으로 당시의 대규모 발굴단을 끌고와 발굴을 진행했다. 이렇게 1906년 일본의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에 의해 발견되어, 1935년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나 미즈노 세이치(水野清一) 등에 의해 대규모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전후 각지에서 발굴이 잇달았으며, 채도 세석기의 특징을 가진 이 문화는 1954년 홍산후를 기념하여 홍산 문화라고 명명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이 실시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입각한 공정 연구의 일환으로, 2003년 6월부터의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을 통하여 중국 황하문명보다 빠른 요하문명을 중화문명의 뿌리로 규정하고 있다. 이제까지 야만인인 동이족의 땅으로 보던 요하문명을 중국문명의 시발점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이를 중화민족과 중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2012년 7월 초,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내몽고 제1공작대와 아오한치(熬漢旗) 박물관의 합동발굴팀은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츠펑시 오한치의 싱룽고우(興隆溝·흥륭구) 유적 제2지점에서 53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소남신상(陶塑男神像, 흙으로 구운 남신상)’을 발굴하였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여신상은 발굴된 적이 있지만, 남신상이 발견된 것은 중국 최초이다. 인민일보·CCTV 등 중국 언론들은 “5300년 전의 조상 발견”, “중화조신(中華祖神) 찾았다”는 내용으로 발굴성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와함께 2004년 11월, 기존의 랴오닝성박물관(遼寧省博物館, 요녕성박물관)을 개축하여 건축면적 2만 8900m2, 12개 전시실에 전람면적 8530m2에 이르는 신관을 개관하였고 2010년 8월 8일, 중국 내몽고 자치구 적봉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같이 중국 내몽고에는 박물관 신축과 개관, 확장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적봉시 인근의 오한기(敖漢旗)·임서(林西)박물관은 신축을 마치고 2010년 후반기에 이전했고 극십극등기(克什克騰旗) 역사박물관과 파림좌기(巴林左旗)의 요상경(遼上京)박물관은 그전에 이미 신축해 개관됐다. 요하를 중심으로 발견된 고고학적 성과, 즉 홍산문화를 정점으로 하는 이른바 '요하문명'을 집중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생활상

훙산 문화에서는 수렵,채집 중심으로 후기에 기초적인 농작이 보인다. 신석기 시대의 특징을 보인다. 가축을 사육한 축산도 발달하고 있어 돼지 이 길러졌다. 한편에서는 수렵이나 채집 등으로 야생 동물을 사냥하거나 야생초를 채집하기도 했다.

유적 유물

이들은 만든 옥들과 용등을 본떠 만든 비취등의 구슬로부터 현재 중국에 연결되는 문화나 종교의 존재도 볼 수 있다.

홍산 문화의 주된 유적은 서 랴오허 상류의 지류인 황수(潢水) 및 투허(土河) 유역에 퍼져 있다. 발견된 석기는 타제석기, 마제석기, 세석기 등으로 그 대부분은 신석기 시대의 농기구이며, 돌보습(石耜), 돌쟁기(石犁), 돌호미(石鋤) 등의 종류가 많다.

홍산 문화의 도기는 진흙 홍도 및 협사회도(夾沙灰陶)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진흙으로 만들어 붓으로 그림 그린 채도(채문 토기)는 취사나 식사 등에 사용되고, 문양이 새겨진 협사회도는 음식을 담는 곳에 사용되었다. 다른 도기에서는 임산부를 본뜬 흉상이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홍산 문화에서는 양사오 문화와 같은 채도 문화는 발달하지 않았지만, 룽산 문화 흑도와 같은 세련된 조형미를 가진다. 또 후기 유적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환도도 발견되고 있다.

홍산 문화의 분묘에서는 비취 등의 석재로 동물 등의 형태로 조각한 장식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돼지, 호랑이,  외에도 용을 새긴 것도 발견되고 있다. 높은 공예의 수준이 홍산 문화의 큰 특징이 되고 있다. 《저룡(猪龍)》또는 《옥저룡(玉猪龍)》이나 《옥웅룡(玉熊龍)》등으로 불리는 홍산 문화의 옥용(용을 조각한 구슬)의 조형은 단순하며, 용이 원형으로 된 것이 많지만, 후기로 가면서 반용(盤龍), 문용(紋龍) 등의 구별이 분명해진다. 고고학자 중에는 홍산 문화가 이후 중국에서 시작된 용 숭배의 근원이라는 주장이 있다.

주로 저룡(猪龍)이나 옥저룡(玉猪龍)이라고 명명하는 형태의 용을 본뜻 모양을 중국에서 시작된 용 숭배의 근원이라고 보고 있다. 홍산문화에서 적석총(돌무지무덤)과 옥기가 발견되는 것을 근거로 하여, 홍산문화가 적석총이 다수 발견되는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한민족(韓民族, 또는 동이족)문화의 연원이라는 견해가 나오면서 대한민국(大韓民國))과 중국에서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5]

현재 중국은 홍산문화 유적지가 밀집한 내몽고의 적봉시, 옹우특기, 오한기, 요녕성의 능원시, 건평현 조양시 등의 상징을 몇 해 전부터 홍산문화의 상징인 옥저룡(玉猪龍)ㆍ옥웅룡(玉熊龍)으로 교체했다. 중국 영토에 사는 민족은 중화민족이고 역사도 중국사라는 논리이다. 56개 민족을 하나의 단일한 중화민족으로 묶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론의 바탕이다.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1996~2000)’→‘동북공정(2002~2007)’→‘중화문명탐원공정(2003~ )’→‘국사수정공정(2005~2015)’으로 이어지는 논리의 구조이다.

현재 진행 중인 국사수정공정은 이런 일련의 역사 관련 국가 공정의 완결판인데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들을 토대로 중국사를 전체적으로 수정하는 것이다. 2005~2007년 기초자료 수집을 마치고 2007년부터 본격 수정을 시작해 2015년 완료를 목표로 중국의 정사(正史)인 25사를 대대적으로 수정해 재편찬하고 있는 것이다.

 

뉘우허량 유적

 
홍산문화(뉘우허량 유적)에서 발견된 다양한 모양의 옥기와 문암리 옥결(오른쪽 하단)

1983년 랴오닝성 링위안 시에서 젠핑 현에 걸친 넓은 범위에서 발견된 《뉘우허량 유적》(牛河梁遺跡, Niuheliang)에서는 기존의 홍산 문화와 다른 거대한 제사 시설이 발견되었다. 유적은 5km2의 넓은 범위에 돌을 쌓아 만들어진 분묘나 제단이 정연하게 분포하고 있다. 또한 돌 마루와 채색한 벽이 있던 신전이 발견되었고, 눈을 비취로 만든 여성두상 도기가 발견되어 《여신묘》라고 불리게 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지하 1m에서 제사를 지냈던 장소나 제단, 벽화, 돌무덤(석총) 등이 발견되었다.

여신묘 안에는 사람 세 배 크기의 도제의 상이 줄지어 있었다. 이 상은 신상으로 추측되며, 현재 중국 문화에서는 유례없는 것이다.

뉘우허량에서 발견된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존재나 또 여러 가지 토지와 교역의 증거로 인해 이 시기에 선사시대의 수장국인 왕국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여신묘에서는 채도도 발견되었다. 부근에서 60개 이상의 고분도 발굴되었고, 이것들은 돌을 짜서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약돌을 씌워 무덤을 만들었다. 그 내부에서 구슬 등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근처의 두 곳의 언덕 위에는 돌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가까운 곳에서는 석회암을 쌓아 올려 만든 둥근 무덤이나 사각형의 무덤도 있었다. 이러한 고분 중에서는 곰이나 용, 거북이의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유물로 홍산 문화에서는 이미 제물을 바쳤다는 지적이 생겨나고 있다.

양사오 문화 초기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에서 알 수 있듯이 홍산 문화의 유적에서도 초기의 풍수의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뉘우허량 유적 등, 홍산 문화의 제사 유적에 볼 수 있는 원형이나 방형(사각형)은 천단의 우주관이 벌써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시사하고 있다.

1980년 초기, 이전에는 역사기록에 없는 그 누구도 몰랐던 여신묘에서 다량의 옥기가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다. 또한 중국의 옥기 전문가들은 이곳에서 옥을 자를 때 쓴 도구를 발견했는데, 당시 그 시대와 동일한 조건에서 실험을 해보니 실제 발굴되는 것과 비슷한 1.5cm정도 두께의 옥에 모래나 옥가루를 뿌려가면서 나무 막대기를 돌려서 구멍을 파는데 순수한 작업시간만 31시간이 걸렸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되는 정교한 옥기 하나를 완성하려면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중국 학자들은 홍산문화 시대에 최소한 몇등급으로 신분이 분화되었다고 주장하는데 홍산문화 시대에 옥기를 만드는 장인집단이 따로 존재했었고, 신분이 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해 묘장 마다 크기가 다르고, 매장 방식이 다른 것도 신분 분화의 증거라는 이유다.

여신묘와 한 변이 20~30미터짜리 3층 피라미드식 적석총, 가장 큰 60미터짜리 7층 피라미드식 적석총을 쌓으려면 많은 인원을 필요하므로 중국학계에서는 홍산문화 후기 단계를 초기 국가단계, 초기 문명단계라고 보고 있다. 우하량 제2지점 제단 유적지 안내문에는 ‘약 5500년 전에 이미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홍산문화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다만, 중국 외의 타 국가에서는 홍산문화가 도시화, 문자 사용, 계층 분화 등 문명의 요소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고 보아 독자적 문명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기존의 역사학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단계에 진입한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는 문자와 청동기였는데 홍산문화 시대에 문자와 청동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초기 국가단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여러 형태로 있는 다량의 옥기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 뉘우허량 유적의 발견이후 청동기가 없어도 국가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줘 ‘옥기시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이것은 뉘우허량 유적으로 대표되는 흥륭와문화(홍산문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츠펑(몽골어: Ulaganqada.svg(Ulaɣanqada), Улаанхад(울란하드), 중국어: 赤峰, 병음: Chìfēng)은 내몽골 자치구 남동부에 위치하는 시이다. 츠펑은 몽골어의 울란하드(붉은 산)에서 유래되었다.

고고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츠펑 지역의 인간의 존재는 거의 1만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고 문화적인 역사는 8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홍산문화의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들, 초원 청동 문화, 친단 요 문화, 몽골-원 문화가 츠펑 지역에서 발견된다. "싱룽거우 문화"로 불리는 고대 마을 유적은 역사가들에게 "중국의 첫 번째 마을"로 여겨진다. 가장 큰 옥룡(Jade Dragon)이 이곳에서 발굴되었고 "중국의 첫 번째 용"으로 불린다. 현재까지 발견된 고대 문화의 유물과 유적은 6800곳이 넘는다. 츠펑은 요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요의 상경(上京) 유적이 시역 내에 위치한다. 요의 멸망 후에는 몽골 민족이 살았고, 청대에는 자오우다 맹(昭烏達盟)으로 불렸다.중화민국 시대와 만주국 시대에는 러허 성의 관할이 되었고, 1955년, 러허 성의 폐지에 의해 내몽골 자치구에 편입되었다. 1983년에 자오우다 맹이 폐지되고 츠펑 시가 설치되었다.

 

차오양(조양, 중국어 간체자朝阳정체자朝陽병음Cháoyáng)은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에 있는 도시이다. 차오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쑹링 산맥에서 백악기 초의 새 화석이 두 개 발견되었다. 인구는 340만 명, 면적은 19736km2이다. 차오양은 성도 선양과 수도 베이징의 거의 정가운데 있다.

차오양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5000~6000년 전의 홍산 문화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기원전 3세기 한나라초엽에 처음 '류성'(柳城)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4세기와 5세기 오호십육국시대에 전연후연북연 등이 이곳을 통치했다. 당나라 때 차오양은 동북아시아 문화,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써 번영하였다.

 

홍산문화 유적지 3곳 위치
모두 산맥으로 구분되는 요하지역 요하 강 상류 지역에 있다.

 

태백산이 한반도에 있는 것이 아닌, 요서에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 있는 연구 글들도 있던데, 박달나무가 북경, 요하, 동북3성과 한반도 북부 일대에서 자생한다는 점, 상나라 왕족인 

기箕족이 백적족 지역, 상나라 북쪽에 위치했던 점, 황하 주변 농경 민족은 항상 북방 유목민족 공격을 받았던 점, 요하문명 하층문화 중심지가 요서란 점에서 그렇게 생각됩니다.

 

기초지식칼럼 

요하문명(遼河文明) 이문호 프라임칼럼 대표

성씨(姓氏)별 유전자(gene)하플로그룹(Haplogroup)SNP 관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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