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성姬姓 심씨沈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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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성씨

희성姬姓 심씨沈氏

 

중국의 심씨(沈氏)

 

주 문왕(周 文王) 서백 희姬 창昌

18명의 아들을 뒀고, 본처 태사(太姒) 형제는 10명,
1 백읍(伯邑) 고(考) : 상商나라 왕 제신(帝辛)이 문왕 희창을 유리에 있는 성에 가뒀을때 죽여 죽을 쒀 먹였다.
2 주周무왕(武王) 발(發) : 당, 진, 위, 한, 정, 공손, 석, 주나라가 망할 때 주周 씨로 바꿨다.

3 관숙(管叔) 선(鮮) : 관(管)
4 주공(周公) 단(旦) : 노(魯), 계손, 숙손, 맹손, 공(公)
5 채숙(蔡叔) 도(度) : 채(蔡)
6 조숙(曹叔) 진탁(振鐸) : 조(曹)
7 성숙(成叔) 무(武) : 성(成)
8 곽숙(霍叔) 처(處) : 곽(霍)
9 강숙(康叔) 봉(封) : 강(康) 위(卫=衞), 석石

冰 총 13성

10 담계(聃季) 재(載) : 심(沈)

모숙 정(叔 鄭)

곡숙(叔)

옹백(伯)

착숙 수(叔 繡)

필공 고(公 高) 필씨에서 위魏씨로 바뀜

원백(伯)

풍후(侯)

십팔남: 순백(伯)

 

희姬성姓 심沈씨氏

심(沈)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다. 중국에 대략 650만명, 한국에 대략 30만명이 있으며, 심제량(沈諸梁, 섭공=엽공)의 후손인 엽(섭, 叶=葉)씨의 650만명을 포함하면 중국에 대략 1300만명이 있다. 명(明)·靑(청)대에 중국과 한국뿐만이 아니라 일본, 대만,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에 널리 퍼졌으며, 현대에 들어와 미주, 유럽, 오세아니아, 중동 등 전세계로 퍼졌다. 주나라 문왕(周文王)의 후손 동족 성씨(同族 姓氏)들을 모두 포함하면 대략 수억명으로 중국 성씨 순위 1위, 2위를 다툰다.

 

중국

심(沈)씨는 중국의 건국시조 황제 헌원씨(黃帝 轩辕氏, 희(姬)씨)의 후손으로 주나라(周國)에서 계출된 성씨이다. 주나라 문왕(周文王)의 10번째 태자 담계 재(聃季載)심나라(沈國)를 건국하였는데, 채나라(蔡國)에게 멸망하였다. 담계 재(聃季載)의 후손이 나라이름으로 성(姓)을 명(命)하고 심씨(沈氏)라 일컬었다. 인물로는 초나라 좌사마 심윤술 (沈尹戌), 초나라 영윤 심제량 (沈諸梁, 섭공=엽공[葉公=叶公], 엽[섭, 叶=葉]씨의 시조, bc 550년 ~ bc 480년), 남조 송나라 제3대 황제 송 문제의 황후 명선황태후 심용희 (沈容姬, 424년 ~ 453년), 양나라 시중 심약 (沈約, 441년 ∼ 513년), 남조 진나라 초대 황제 무제 진패선의 부마이자 마지막 황제 후주 진숙보의 국구 심군리 (沈君理, 525년 ~ 573년)와 그의 딸 황후 심무화 (沈婺華), 남조 진나라 제2대 황제 문제 진천의 국구 심법심 (沈法深)과 그의 딸 황후 심묘용 (沈妙容, ? ~ 605년), 당나라 제8대 황제 당 대종의 국구 심역직 (沈易直)과 그의 딸 황후 심진주 (沈珍珠), 송나라 학자 심괄 (沈括, 1031년 ~ 1095년), 원나라 말기 ~ 명나라 초기 대부호 심만삼 (沈萬三, 沈万三, 1330년 ~ 1379년), 명나라 내각대학사 수보 심일관 (沈一貫, 1531년 ~ 1615년),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부 부장(문화부 장관) 심안빙 (沈雁氷, 1896년 ~ 1981년) 등이 있다.
중국에서 심(沈)씨의 인구 순위는 1987년 통계 기준으로는 37위로 0.5%의 비율로 대략 650만명이며, 2006년 중국과학원 통계 기준으로는 49위로 0.42%의 비율로 대략 550만명으로 편차가 심하다. 심제량(沈諸梁, 섭공=엽공)의 후손인 엽(섭, 叶=葉)씨의 인구 순위도 1987년 통계 기준으로는 49위로 0.42%의 비율로 대략 550만명이며, 2006년 중국과학원 통계 기준으로는 42위로 0.49%의 비율로 대략 630만명으로 역시 편차가 심하다. 심(沈)씨와 엽(섭, 叶=葉)씨를 합치면 대략 0.9%의 비율로 인구 순위 20위이다. 주나라 문왕(周文王)의 후손 동족 성씨(同族 姓氏)들을 모두 포함하면 대략 수억명으로,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 강(姜)씨) 계열의 성씨와 중국 성씨 순위 1위, 2위를 다툰다. 중국 성씨(中國 姓氏) 대부분이 황제 헌원씨(黃帝 轩辕氏, 희(姬)씨)의 후손이거나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 강(姜)씨)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황제(黃帝)는 황(黃) 성(姓) 가족국가(家族國家) 제(帝)임금이란 뜻이고, 황하(黃河)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현재 황하 중류 지역에 있고, 황제(黃帝) 이전에 유웅(有熊)곰나라가 있었다. 황하 지류 희수(姬水)에 살던 사람들이 주(周)나라 왕실 조상들로, 구석기 시대 족(族)혈연 성(姓)은 어머니 이름으로, 사는 지역 강 이름으로 작명했고, 농경 정착하는 신석기 시대가 되면서, 면(宀)집에서 함께 시(豕) 돼지 키우며 사는 족(族)사람들인 가족(家族)이 출현했는데, 생존과 성장에 유리한 1부 다처제 호족(豪族) 중심이 아버지가 되면서, 성(姓)은 부계 혈연으로 바뀌게 됐다. 황하는 5,464km나 되는 광범위한 강이고, 수많은 지류가 있기 때문에, 모두 같은 혈연 관계로 볼 순 없다. 분명한 사실은 희성(姬姓)은 희수(姬水)에 살던 사람들이란 뜻이고, 산시성 함양시 무공현에 있다. 고대 국가와 성씨는 승리한 가족의 역사로, 많은 성씨가 파생됐다는 뜻은, 승리해서 주인으로 군림했다는 뜻이고, 삼황(三皇)= 많은 씨를 파생시킨 뿌리가 되는 큰 성(姓)이란 뜻이고, 오제(五帝)는 크게 알려진 임금이란 뜻이다.

 

한국
심(沈)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71,749명으로 조사되어, 한국의 성씨 인구 32위이다.

 

심沈씨氏 본관

부유(富有) 삼척(三陟) 의령(宜寧) 전주(全州) 청송(靑松) 풍산(豊山)

 

부유심씨(富有沈氏)
시조: 심입인(沈立仁)
<本貫地>
부유(富有)는 전남 승주군(昇州郡)에 있던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둔지현(遁地縣)이다. 주요 성씨로 심(沈)씨가 있었다.
<氏族 개요>
심입인(沈立仁)은 고려조에 지금주사(知錦州事)를 지냈다고 한다.
문헌이 없어 世系나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으며 다만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아 世系를 이어온 듯하다.
후손들로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심효생(沈孝生)과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심도원(沈道院) 등이 전해온다.

 

위키 자료

부유 심씨(富有 沈氏)는 전라남도 순천시를 관향으로 한다. 시조(始祖) 심인립(沈仁立)은 고려조에 지금주사(知錦州事)를 지냈다.
심인립의 아들 심효생(沈孝生)은 1383년(고려 우왕 9)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조선의 개국을 도와 조선의 개국공신(開國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딸이 조선 태조의 세자 이방석의 빈(嬪)이 되면서 예문관대제학에 이르렀으며, 부성군(富城君)에 봉해졌다.[2] 그러나,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 남은과 함께 숙청되었다.
심효생의 아들 심도원(沈道源)은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세종 때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숙(敬肅)이다.
심도원의 손자 심신(沈愼)은 1450년(문종 즉위년) 문과에 급제한 뒤 1456년(세조 2) 좌정언(左正言)·이조좌랑을 역임하였는데, 이 해에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처형되었다. 정조 때 신원되고 복관되었다. 2000년 인구는 1,112명이다.

 

삼척 심씨(三陟沈氏)

삼척 심씨(三陟沈氏)의 일세조 심동로(沈東老)는 초명이 한(漢)이었으며, 고려 말엽에 중서사인(中書舍人)과 예의 판서(禮儀判書)·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 등을 지내고 지제고(知制誥)에 올라 진주군(眞珠君)에 봉해졌다.

1361년(공민왕 10)에 이르러 노령으로 벼슬에서 물러나니 왕(王)이 죽서루(竹西樓)에 나와 칙명(勅命)으로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하사(下賜)하며 식읍(食邑)을 내렸다고 한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고려 문종조(文宗朝)에서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고 문림랑(文林郞)으로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를 역임한 심척충(沈迪沖)의 후손으로 전하나 계대가 불명하여 후손들은 동로(東老)를 일세조로 하여 삼척으로 창본하라는 유언을 만들어 본관을 삼척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동로의 아들 공무(公懋)가 문과에 올라 봉선대부(奉善大夫)로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을 지냈으며, 손자 원복(原福)은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한편 시조의 현손으로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한 가보(家甫: 맹은의 아들)는 양구(楊口)와 흡곡 현령(翕谷縣令)을 지냈고, 그의 아들 희전(希佺)은 중종 때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거쳐 홍원(洪原)과 흡곡 현령을 역임하여, 춘추관(春秋官)의 기주관(記注官)을 거쳐 지제교(知製敎)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된 준(濬: 문계의 아들)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특히 조선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좌랑 준(濬)의 아들 언경(彦慶)과 언광(彦光)의 형제를 들 수 있다.

1516년(중종 11) 문과(文科)에 급제한 언경은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와 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을 거쳐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우 언광(彦光)은 호당(湖當)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던 수재였다.

언광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을 때 형 언경과 함께 희대(稀代)의 간신(奸臣)인 김안로(金安老)를 천거했다. 그러나 차츰 김안로가 횡포를 일삼고 자기의 외손녀를 세자빈으로 삼으려 하자 이를 극력 반대했다가 오히려 안로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좌천되었다.

일찍이 퇴계 이 황(李 滉)이 "시재에는 내가 따를수 없다"고 극찬했던 장원(長源)은 언광(彦光)의 손자로 <불의한 것은 티끌만한 것도 취하지 않는다>는 자계훈(自戒訓)을 지켜 평생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야인으로 살며 강릉(江陵)에서 낚시와 화죽(花竹)을 심는데 일생을 보냈고, 고서화(古書畵)를 많이 모아 어디선지 이서(異書)가 발견되었다고 하면 멀다 않고 달려가 사거나 베껴서 모았다고 하며 시문(詩文) 수십권을 남겨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외 언광(彦光)의 아들로 문집을 남긴 운(雲)과 합천에서 출천지효자(出天之孝子)로 일컬어졌던 일삼(日三)이 유명했으며, 한강(寒岡) 정 구(鄭 求)의 문인으로 학행이 두드러졌던 지택(之擇)은 정조 때 공명과(功名科)에 급제하여 병조와 이조의 좌랑을 거쳐 홍원 현감(洪原縣監)을 지낸 보영(寶永)과 함께 삼척 심씨를 더욱 빛냈다.

 
위키 자료
삼척 심씨는 세보에 따르면 고려 15대 숙종(1095년 ~ 1105년) 때 군기시 주부를 역임한 심적충(沈迪冲)과 그의 아들 심후(沈侯)는 대대로 삼척에 세거한 가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간 세보가 실전되어 고려 말 집현전 제학을 지내고 진주군(眞珠君)에 봉해진 심동로(沈東老)를 1세조로 하고 있다. 인물로는 조선 중종 때의 형제 이조판서 심언경, 심언광 형제가 있다. 2015년 인구는 17,034명이다.

 
의령심씨(宜寧沈氏)
시조: 심문준(沈文濬)
<本貫地>
의령(宜寧)은 본래 신라의 장함현(獐含縣)이다. 주요성씨로 沈, 高, 仇, 南, 董, 徐, 王씨 등이 있었다.
<氏族 개요>
시조 심문준(沈文濬)은 고려조에 벼슬이 지삼사사(知三司事)에 이르렀다고 한다.
世系나 창씨 유래 등을 알 수 있는 문헌은 전해오지 않는다.
다만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宜寧을 본관으로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고 짐작할 뿐이다.
 
전주심씨(全州沈氏)
시조: 심현(沈賢)
<本貫地>
전주(全州)는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 또는 比斯伐 · 比自火)이다. 주요 성씨로 沈, 李, 全, 朱, 崔씨 등이 있었다.
<氏族史의 개요>
문헌이 없어 세계(世系)나 본관의 유래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후손들이 고려조에 예빈성승동정(禮賓省丞同正)을 지낸 그를 시조로, 전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위키 자료
전주 심씨(全州沈氏) 시조(始祖) 심현(沈賢)은 고려조(高麗朝)에 예빈성승동정(禮賓省丞同正)을 역임했다.

 
청송심씨(靑松沈氏)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시조(始祖)로 받들고, 그의 증손 덕부(德符)가 우왕(禑王)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가 청성충의백(靑城忠義伯)에 진봉되어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덕부(德符)는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使)와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정종 즉위년에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원부(元符)는 고려 말에 여러 관직을 거쳐 전리판사(典理判事)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王朝)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후손들도 그의 유훈을 받들어 <선훈불사(先訓不仕)>라 하여 대대로 벼슬을 멀리 하였다.
일찍이 조선 개국(開國)을 시작으로 명문벌족(名門伐族)의 지위를 굳혀온 청송 심씨는 덕부의 아들 7형제 대(代)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융성하여가장 화려한 인맥(人脈)을 이루었다.
세종(世宗)의 장인이면서도 상왕(上王)인 태종(太宗)의 비위에 거슬려 끝내 왕명(王命)으로 죽음을 당했던 온(溫)은 청성군 덕부의 다섯째 아들이다.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 병권(兵權)만을 장악하고 있었다. 온의 막내 아우인 청( 正)이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를 상왕이 쥐고 흔드는 것을 부당하다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 습(朴 習)에게 불평한 것이 상왕의 위에 들어가 옥사가 일어났다.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박 은(朴 은 : 당시 좌의정)이 "심 온에게 인심이 쏠린다"고 고변하여, 영의정(領議政)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피체되어 한양에 압송된 후 수원에서 사사되었다.
죽음에 임하여 온은 "내 자손들은 대대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후 심씨는 대대로 그 유언을 지켜 박씨와 혼인을 논하지 않다가 온의 현손(玄孫) 의(祥 : 부사맹 의창의 아들)와 융(隆 : 경력 의겸의 아들)이 박씨와 혼인했는데 후손에 아들이 없거나 자손이 융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온의 아우 종(淙)이 태조의 부마로 청원군(靑原君)에 봉해졌고, 온의 둘째 아들 회(會)는 세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여 부자 영상의 영예를 누렸다.
회의 아들 3형제 중 막내 원(湲: 내자시 판관을 역임)의 아들 순문(順門)은 장령(掌令)으로 연산군의 어의에 대하여 크기를 논한 것이 화근이 되어 갑자사화 때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참형을 당했다.
「정암연주(靜庵筵奏)」에 의하면 그는 임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죄목으로 화를 입었다고 하며, 그의 죄업은 죽음을 두고 대간들이 무척 논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일설(一說)에는 술문이 무척 사랑했던 기생을 연산군이 강탈해 간 일이 있었는데 이같은 관계를 둔 연적(戀敵)에 의한 대립감정이라고 한다. 또 그의 할아버지 회(澮)가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尹氏)에게 사약을 내릴 때 영의정이었다는 연유로 관작이 추탈되고 부관참시 되었으며, 그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했다고도 한다.
순문의 아들로 명종(明宗) 때 영의정에 올라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진봉되었던 연원(連源)은 아버지 순문이 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형을 당했으므로 일생동안 그 앞을 지나다니지 않았다고 하며, 항상 왕실의 외적됨을 경계하여 그의 손자 이름들을모두 겸(謙) 자 돌림으로 지었다고 한다.
영원의 아우 봉원(逢源)은 명종 때 사예(司蘂)를 지내고 동지돈령부사(同知敦零府事)에 이르렀으며, 그림·글씨·음률·의술에 능통하여 시문(詩文)에도 조예가 깊었다.
심기안정법(心氣安定法)을 터득하여 태화산(太華山) 기슭에서 집을 짓고 살며 자호(自號)를 효창노인(曉窓老人)으로 하여 하얀 수염을 날리며 산수(山水) 틈에서 여생을 살았는데, 옷은 반드시 무게를 달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지어 입었으며 밥도 숟갈을 세어서 먹었고, 씹는 것도 그 속도나 회수가 저애져 있다고 하며 동작도 휴식도 조절하였고 마음쓰는 것도 그 심도의 분량을 근량으로 재는듯 하였다.
막내 아우인 통원(通源)은 명종(明宗) 때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과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연원의 아들 강(鋼)이 명종비(明宗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버지로 활인서 별좌(活人署別坐)를 거쳐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영돈령부사(領敦零府使)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권귀 속에서도 가풍을 지켜 신진사류로서 화를 당하려던 박 순(朴 淳) 등을 아들 의겸(義謙)과 함께 구하고 권신 이 양(李 樑)을 제거하여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의 아들 의겸은 서인의 거두로서 선조 때 좌부승지(左副承旨)와 대사간(大司諫)·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낸는 동안사림의 명망이 높았으며, 아우 충겸(忠謙)은 임진왜란 때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청림군(靑林君)에 추봉되었다.
한편 중겸의 아들 열(悅)은 인조 때 경제에 능한 정치가로 명망이 높았으며 좌·우의정과 영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에 이르렀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동지돈령부사 봉원의 손자 희수(喜壽)는 선조 말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좌·우찬성(左·右贊成)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한 후 권신 이이첨의 전횡이 심해지자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右議政)에 전임되어,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의 신원을 상소했다가 사형을 당하게 된 정 온(鄭 )을 구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특히 그는 상신의 벼슬을 지내면서도 허물어져 가는 집 안 채밖에 없어서 임금이 대궐의 말 한 마리를 보내어 팔아서 집을 고치라고 시켰을 만큼 가난하게 살았으며, 만년에 둔지산(屯之山)에 들어가 시로써 여생을 보냈다.
부사(府使) 종심(宗沈)의 손자이자 설(설)의 아들로 효종조(孝宗朝)의 영상이던 지원(之源)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아들 익현(益顯)과 함께 필명(筆名)을 떨쳤으며, 지원의 중손 사정(師正)이 산수화(山水畵)에 새로운 화풍을 이루어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저명했다.
영조 때 영의정으로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 달력을 만드는 신법을 연구해 오게 했던 수현(壽賢 : 응교 유의 아들)의 아들 육(육 : 찬선을 지냄)은 효자로 이름을 떨쳤다.
선조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했던 달원(達源)의 손자 우승(友勝)은 호조 참판에 올라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사의 행패를 다스리다가 무고를 당했고, 그후 한성부 우윤을 거쳐 사후(死後)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호성이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흥원(興遠)의 손자 우신(友信)은 임진왜란 때 가재를 팔아 수천명의 의병을 일으켜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진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순절하여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으로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던 기원(器遠)이 좌의정을 역임하여, 정조 때 좌의정에 오른 환지(煥之 : 교리 태현의 손자. 진의 아들)와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예조 참판 염조(念祖)의 아들 상규(象奎)는 순조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당시의 제 1인자로 손꼽혔다.
그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용맹을 떨쳤던 우정(友正)의 아들 현(言見)이 인조 때 여러 군현(郡縣)의 수령(守令)을 지내고 돈령부 도정(敦零府都正)에 이르러 병자호란 이 일어나자 종사(宗社)를 따라 강화(江華)에 피난가서 청병(淸兵)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묘(家廟)의 위패(位牌)를 땅에 묻은 후 국난의 비운을 통탕하는 유소(遺疎)를 쓰고 부부가 함께 자결했다.
역사상 이들 부부처럼 태연하고 절도있는 죽음은 없었다고 하는데, 그때 부부의 나이가 70세였다. 조카 심동구(沈東龜)가 배를 대놓고 피난할 것을 발을 구르며 재촉하고 있는데 현은 애써 돌려보내고 조복을 입은 다음 동향사백을 하고 임금에게 올리는 유소를 지었다.
<신(臣) 현(言見)은 동향사배하고 남한산성에 계신 주상전하에게 올리옵나이다>로 시작된 이 글의 내용은 임금에 대한 보은의 죽음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그 유소를 외손자 박장원(朴長遠)에게 주어 배를 태워 보낸 다음 부인 송씨를 돌아보며 "정(情)은 백년을 같이하고 의(義)는 한번 죽음을 같이하니 내가 충신(忠臣)이 되고 그대는 충신의 아내가 되지 않겠는가" 하며 함께 죽을 것을 권유하자, 송씨는 "종용당고사(從容堂故事 : 죽음이 주는 생리적 고통이나 정신적 갈등을 무화시킨다는 뜻)을 본받겠나이다" 하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서로 마주보며 "갑시다" 하고는 목을 매었는데, 서로의 어깨를 짚고 편안히 운명에 종용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고 한다.
구한말에 와서는 철종 때 한성부 판윤과 대사헌(大司憲)·예조 판서 등을 지낸 경택(敬澤), 형조 판서 의면(宜冕), 공조 판서를 거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의원(宜元), 고종 때 영의정에 올라 청·일 강대국 사이에 끼인 한국의 갖가지 어려운 정치적 고비를 겪었던 순택(舜澤), 예조 판서 이택(履澤),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상학(相學)이 유명했으며, 상훈(相熏)은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와 이조 판서를 거쳐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을 역임하여, 농촌문학의 선구자인 훈(薰 : 본명 대섭, 상록수 저자)과 함께 명문 청송 심씨를 더욱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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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심씨(靑松沈氏)의 시조는 고려 25대 충렬왕(1236년 ~ 1308년) 때 문림랑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이다. 그의 증손 심덕부(沈德符)는 고려 우왕 때 문하찬성사에 이르러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지고, 공양왕 때 문하시중이 되어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에 진봉되었다. 조선 개국 후에는 개국 공신으로서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지고, 판문하부사, 영삼사사, 문하부 좌정승을 지냈다. 인물로는 심의겸, 조선 세종의 장인인 심온과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 조선 세조 때 영의정에 오른 심회(沈澮), 조선 명종 때 영의정에 오른 심연원(沈連源) 등이 있다. 2015년 인구는 240,768명이다.

 
풍산심씨(豊山沈氏)
풍산 심씨(豊山沈氏)의 시조(始祖) 심만승(沈滿升)은 중국(中國) 오흥(吳興 : 지금의 절 강성 북구와 태호 남쪽 기슭에 위치한 지명) 출신으로 천성(天性)이 총민하고 박학다능(博學多能)했으며, 1110년(예종 5) 동료 호종단(胡宗旦 : 복주인)·유 재(劉 載)·안신지(安愼之) 등과 함께 상선(商船)을 따라 동래(東來)하여 태백산(太白山) 아래인 풍산현(豊山縣)에 정착하였고,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나 예종(睿宗)의 총애를 받았으며 청환직(淸宦職)에 발탁되어 상서봉어(尙書奉御)를 거쳐 태자첨사부 첨사(太子詹事府詹事)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풍산(豊山)에서 세거하면서 만승(滿升)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풍산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시조 만승의 8세손 승경(承慶)이 고려 말에 전농시사(典農寺事)와 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난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와 시서(詩書)로 자오(自娛)하며 여생을 마쳤고, 그의 아들 귀령(龜齡)이 조선 초기에 크게 현달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王子)의 난에 대장군(大將軍)으로 방원(芳遠)을 도와 박원길(朴元吉)과 정도전(鄭道傳)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웠던 귀령은 제2차 왕자의 난에도 방원에게 가담하여 태종(太宗 : 방원)이 즉위하자 좌명사등공신(佐命四等功臣)으로 풍천군(豊川君)에 봉해졌으며, 1408년(태종 8)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전라도 연안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여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다.
한편 귀령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보(寶)는 관찰사(觀察使)를, 차남 실(實)은 군수(郡守)를, 막내 치( )는 목사(牧使)를 역임하여 가통(家統)을 이었고, 실의 아들로 백부(伯父)인 보에게 출계(出系)한 주(州)는 절의(節義)가 뛰어났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올랐던 주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몰아 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개탄하여 벼슬을 버린 수 김포(金浦)로 은거, 두견가(杜鵑歌)를 부르며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고 목사 치( )의 둘째 아들 응(膺)은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으로 풍산부원군(豊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풍창군(豊昌君)에 봉해졌던 형(亨)과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던 정(貞)의 형제는 풍산부원군 응의 아들로서 소격서령(昭格署令)을 역임한 아우 의(義)와 함께 명성을 떨쳐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이 극에 이르렀던 1502년(연산군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정(貞)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고, 성천 부사(成川府事)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신진사류인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고 남 곤(南 袞)·홍경주(洪景舟) 등과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주도하여 신진사류들을 몰아내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의(義)는 문장(文章)이 뛰어나 성세창(成世昌)·서경덕(徐敬德)등과 함께 교유가 깊었고,「대·소관부(大·小觀賦)」 등의 명문(名門)을 지어 명성을 떨쳤으며, 바보로 자처하여 벼슬을 그만 두었기 때문에 사화(士禍)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문무겸전(文武兼全)으로 중종의 총애를 받았던 사손(思遜 : 좌의정 정의 아들)은 비변사 낭관(備邊司郎官)으로 야인(野人) 정벌에 공(功)을 세웠고 교리(敎理)·병조 정랑(兵曹正郞)·수찬(修撰)·응교(應敎)·사인(舍人) 등을 거쳐 만포진 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어 변방 방어에 힘쓰다가 야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정(貞)의 셋째 아들로 백부(伯父)인 원(元)에게 출계(出系)한 사순(思順)은 중종(中宗) 때 등과하여 호당(湖當)에 뽑히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올랐으나 익명서(匿名書) 사건으로 김안로의 무고(誣告)를 받아 고문중에 죽었다.
사손(思遜)의 아들 수경(守慶)은 75세와 81세에 아들을 낳아 연로생자(年老生子)의 기록을 세웠고, 팔도 관찰사를 지낸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특히 그는 유학자(儒學者)이면서도 무예(武藝)에 뛰어나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데 오발사중(五發四中)을 하여 무공(武功)을 떨쳤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나 소실되고 「상제잡의(喪制雜儀)」와「견한잡록(遣閑雜錄)」·「귀전창수(歸田唱酬)」전한다.
그가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나갔을 때 당시 미신으로 귀신을 섬기는 음사(淫祠)가 많이 있었는데 궁중(宮中)과 연관을 맺어 복(福)을 비는 곳으로 되어 있어 관에서도 손을 쓰지 못했던 것을, 그가 유생(儒生)들의 청으로 인하여 사당집을 불사르고 무당을 잡아 가두었다. 이에 문정왕대비(文政王大妃)가 크게 노하여 맨먼저 주장한 유생을 잡아 가두게 하니 수경은 "모든 것이 내가 한 일이므로 유생은 죄가 없다" 하고 자핵소(自劾疏)를 올리니 왕은 가상히 여겨 벌주지 않았다.
그가 개성을 떠나올 때 백성들이 거리를 메워 수레를 에워싸고 울면서 참아 놓지 못했으며, 비(碑)를 세우고 노래를 지어 사모하였는데 지금까지 그 노래가 전해내린다고 한다.
수경의 증손 노(魯 : 관의 아들)와 제(齊)의 형제도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우승지(右承旨)와 부사(府使)를 각각 역임했고, 부총관(副摠管)을 지낸 연(延)은 첨지충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익한(翊漢), 한성 좌윤(漢城左尹) 청(日星), 감찰(監察) 운식(雲植) 등과 함께 풍산 심씨를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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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 심씨(豊山沈氏) 시조 심만승(沈滿升)은 중국 오흥(吳興) 출신으로 1110년(예종 5년)에 상선을 타고 고려에 동래하여 풍산현(豊山縣)에 정착하였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1112년에 상서봉어, 1114년에 태자첨사부 첨사를 역임하였다고 한다. 9세손 심귀령(沈龜齡, 1350년 ~ 1413년)이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고 풍산군(豐山君)에 봉해졌다.[1] 심귀령의 증손 심정(沈貞)이 1527년 좌의정에 올랐고, 심정의 손자 심수경(沈守慶)이 1590년(선조 23) 우의정에 올랐다. 2015년 인구는 11,187명이다.
 
한국 주요 인물
심훈(심대섭, 작가), 심형래(코미디언, 연기자, 영화감독), 심은진(가수, 연기자), 최강창민(심창민, 가수, 연기자, 예능인), 심수봉(가수), 심신(가수), 심현보(가수, 작곡가, 작사가), 심태윤(가수, 프로듀서), 심지호(연기자), 심진화(개그맨, 방송인), 심은하(연기자, 영화배우), 심혜진(영화배우, 연기자, 방송인), 심민(심순민, 예능인), 심현섭(개그맨, 방송인), 심대평(의정부시장, 대전광역시장, 국무총리실장, 청와대 행정수석, 충남도지사, 국회의원, 자유선진당 대표, 지방자치발전위원장), 심재철(MBC 기자, 국회의원, 한나라당 정책위의장ㆍ최고위원, 국회부의장), 심재덕(수원시장, 국회의원), 심기섭(국회의원, 강릉시장), 심완구(국회의원, 울산광역시장), 심재홍(시흥시장, 의정부시장, 대전광역시장, 전북도지사, 정무제1차관, 인천광역시장, 경기도지사), 심상대(평창군수, 춘천시장, 강원도지사), 심상정(국회의원, 정의당 대표), 심상우(국회의원,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심명보(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변인ㆍ총재 비서실장ㆍ사무총장), 심재권(국회의원, 민주당 총재 비서실장,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심종석(초대 참의원, 참의원 법제사법위원장), 심정구(국회의원, 국회 재무위원장ㆍ예결위원장), 심양홍(연기자), 심정수(야구선수), 심재학(야구선수), 심성보(야구선수), 심창민(야구선수), 심수창(야구선수), 심동섭(야구선수), 심서연(축구선수), 심이택(대한항공 부회장), 심현영(현대건설 사장), 심형구(근대화가), 심흥선(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 대장, 합참의장, 공보부 장관, 총무처 장관), 심의환(총무처 장관), 심우영(경북도지사, 청와대 행정수석, 총무처 장관), 심상명(법무부 장관), 심명필(4대강 본부장), 심창구(식약청장), 심오택(국무총리 비서실장), 심종섭(산림청장, 전북대학교 총장,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 심윤종(성균관대학교 총장), 심화진(성신여자대학교 총장), 심영(심재설, 연기자)

 

주周 문왕文王 희姬성姓에서 파생된 직계 씨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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