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康氏 위씨衛氏는 주周나라 희성姬姓 위강숙衛康叔 봉封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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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성씨

강씨康氏 위씨衛氏는 주周나라 희성姬姓 위강숙衛康叔 봉封 후손이다.

강씨(康氏) 위씨(衛氏)의 부모가 되는 성(姓)은 주(周)나라 왕실 성(姓)인 희(姬)로, 시조(始祖)는 위강숙(衛康叔) 봉(封)이고, 적장자(嫡長子) 계통인 대종(大宗)이 위씨(衛氏), 차남 계통 소종(小宗)이 강씨(康氏)인데, 특별한 점은 강씨(康氏)가 먼저 생겼고, 위씨(衛氏)가 나중에 생긴 것이다.

 

"주(周)의 시조 후직(后稷)은 이름이 기(棄)이다. 그 어머니는 유태씨(有邰氏) 여자로 강원(姜原)이라 하였다. 강원은 제곡(帝嚳)의 원비(元妃)였다."

 

후(后)임금 직(稷)기장 = 좁쌀, 유(有)있었다 태(邰)나라 씨(氏)는, 적(嫡)정실인 며느리가 성(姓)을 계승하고, 다른 며느리 자녀들은 씨(氏)를 창성(創姓)하는 것으로, 어머니 태씨(邰氏)는 원(原)근본이 강성(姜姓)에 있다는 뜻이다. 제(帝)임금 곡(嚳)은 치우천왕과 탁록전쟁으로 중화(中華) 근본 화하족(華夏族) 번창을 이끈 황제(黃帝)의 후손으로, 중국에 있던 고대 국가 성씨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삼황(三皇) = 3개의 성(姓)에 뿌리가 있다는 뜻이다.

 

삼황 하나 신농(神農) = 농사의 신 염제(炎帝) 강석년(姜石年)이 이족(夷族) 백(伯)맏이로 대종(大宗) 성(姓)이 양(羊)양치는 녀(女)여자 강(姜)이고, 그 후손 치우(蚩尤)천왕을 따르던 구려(九黎)는 화하족에게 구이(九夷)이민족으로 불렸고, 황제(黃帝)에게 패하면서 후손들이 나눠졌다. 려(黎)는 수(水)물을 이용해서 화(禾)벼를 물(勿)말, 물에 잠기게 재배하는 논 농사짓는 인(人)사람들이란 뜻이다. 강성(姜姓) 대종(大宗)은 천수(天水)로 화하족 화(華) 한복판인 한중(漢中) 북쪽에 환웅(桓雄)이 단수(檀樹)에 제단을 차리고 상제(上帝) 아버지 신(神)혼백에 단군(檀君) 시작을 알린 태백산(太白山)있는데, 천수와 태백산 사이에 있는 강(江)이 강수(姜水)로, 동음이성 강씨(姜氏) 뿌리는 그곳에 있다.

 

삼황 하나 복희(伏羲) 글자 구성에 있는 견(犬)개와 양(羊)은 북방 유목민인 것을 뜻한다.

 

삼황 하나 화하족 시조(始祖)인 황제(黃帝)로, 제곡은 그 후손이다. 강(姜)은 황제 후손으로 하(夏)나라를 세운 우(禹)를 도운 공으로, 환-이(桓-夷) 강성(姜姓) 강백이(姜伯夷)가 여(呂)땅에 제후로 봉해지면서 강태공 여씨(呂氏)가 시조가 됐다는 얘기가 있는데, 강백이는 사람 이름이 아닌, 이족(夷族)중에서 백(白)엄지 = 능력자, 최고 백(伯)맏이는 강성(姜姓)이란 뜻이다.

 

사마천이 쓴 역사서 사기가 사실이란 전제하에 그렇고, 내가 보기엔 사기는 음양오행 소설이다.

 

삼황(三凰)은 나라 인간 얼굴 눈코입에 해당되는 이세상 낮 적도선 4선녀 며느리 공직생활 3세대 2태백, 두 눈 할어미(㿣圄彌), 두 구멍 한 코 엄마(嚴㛪 嬷), 아래 한입 어미(漁美) 뜻, 화(火)불(弗)아닐 자녀들 'ㅇ'어미 둥울안에 있다는 뜻 소리가 '황'이고, 환인단군(桓因檀君)은 음양오행(陰陽五行) 나라 윤회 모계 중심사회를 뜻한다.

 

오제(五帝)는 다섯 손가락, 다섯 발가락, 머리 엄지 부부와 사지 자녀, 인(因)인할, 대(大)큰 어미 주변 자녀 어른된 둘 결혼한 둑 4, 4쌍 부부 4담, 얼 어린 1~7,8,9 어른 9 구(口)입, 적도선녀 딸 일(一)한 一一一一4 구(口)입 평면(平面) 며느리(㢱乙伊~面鳦理), 위도선 나무꾼 아들 곤(丨)뚫을 丨丨丨丨4 구(口)입 벽면(闢面) 사위(査位), 4쌍 부부(夫사내 口 아내婦) 3세대 정육면체(正六面體) 3차원 나라 몸, 24시간(時間) 4차원 나라 혼, 부부 달(闥)문 Moon Door 통해 돌아올 5차원 죽음 오행 이룬다.

 

음양(陰陽)은 선대조 붕(朋)벗 두달(頭闥), 할머니와 외할머니를 뜻하는 것으로, 양달(陽闥) 30일 + 음달(陰闥) 29일 = 59일 한면(翰面) 반(伴)짝 이룬 6면 = 일년 열두달, 큰어미 해 365일, 자녀 354일, 한 나라 이루고, 양달 아들은 서울로, 음달 아들은 양달로 장가 보내며, 몸 9된 아들 딸, 혼 9됐는지, 여덟 손가락 딸, 여덟 발가락 아들, 저팔계 호랑이 사냥 경쟁 1등해야 혼9 인정받고 임금으로 서고, 7 장난치는 어린 일곱난장이는 벗어난 8 평범한 아우들 선대 4, 후대 4, 나라 머리 서울 사지 전국 팔도로, 나라 얼굴(蘖㐇) 구을(九乙), 홍익(弘益) 어른된 이세상 나라 9주(九州)가 구성되는 것이 음양오행 뜻이다.

 

사람=혼9 + 몸9= 9 어른, 나라 인간(因簡)=혼 부모, 몸 머리 부부1 사지 자녀 4 인(因)인할 = 혼인할 부부 통해 선조 얼 환인한다는 뜻, 일곱 아우들과 경쟁 통해 부부로, 자녀 결혼시킨 부모로 환인(桓因)하는 길목, 손목 = 딸의 길, 발목 = 아들 길, 자녀 결혼시킨 나라 머리로 가는 길목(木나무 아들, 目눈 딸, 4세대)상(相)서로 다를 적도선 위도선 돌 윤회, 부부가 되면서 이세상과 저세상 5행 윤회 완성된다.

 

사마천이 조사한 성씨들은 실존했기에 조사됐겠지만, 그 선조가 어떤 존재인진 한족(漢族)이 만주로 진출한 시점에 사기가 쓰여졌고, 지역 통치를 위해 한족 주관으로 쓰여질 수 밖에 없는데, 알타이어족 한국어 중심지 만주 홍산 옥기문명 북방계 말소리, 모양 한자 음양오행 뜻과 같고, 성(姓)나라는 어머니가 시조(始祖)라고 한자에 써있고, 씨(氏)파(派)물갈래 부마도위(附馬都位), 사지에서 경쟁 서울로 선발하는 시스템이 음양=내가와 외가, 서로 다른 두 우물(宇物) 해(解)풀 어미(漁美)로부터 출산한 자녀들 결혼한 부부로 하나되는 것이 나라다.

 

사기에 쓰인 내용들 역시 현재 부계 사회 관점으로 한자를 해석하고 있고, 한국어와 한자는 그보다 더 이전 고대 모계사회로부터 시작된 글자와 말소리인걸 인식해야 하고, 1,500년이나 옛날 얘기를 쓴 사기를 진실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존재하는 성씨들 수집해서 엮은 Fact도 있기 때문에 참고는 할 수 있다.

 

원비(元妃)는 원(元)으뜸, 왕비들 중에서 최고란 뜻, 적(嫡)정실은 조상 제사를 모시는 종부(宗婦)란 뜻입니다. 정실인 이유는 구이(九夷)가 따르는 백이(伯夷) 성(姓) 강(姜)이기 때문으로, 주(周)나라 여상(呂尙)이 강상(姜尙)으로, 씨에서 성으로 다시 바꾸고 숙제(叔齊), 제(齊)나라를 다스린 이유가, 강성(姜姓)이 구이(九夷)를 대표하는 백(伯)이기 때문으로, 구이(九夷)가 주(周)나라에 승복하고 따른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숙제(叔齊) = 제(齊)나라 윗대 뿌리는 백이(伯夷) = 이족(夷族) 적(嫡)인 강(姜)이란 뜻입니다. 황제 후손인 제곡의 원비가 강(姜)이란 뜻은, 구이(九夷)가 황제 후손인 제곡에게 승복하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기(棄)는 농사를 잘 지었다. 제요(帝堯)가 소문을 듣고 기(棄)를 농사(農師)로 삼았다. 제순은 “기(棄), 인민들이 바야흐로 굶고 있으니 그대가 후직(后稷=좁쌀의 임금)이 되어 때에 맞추어 백곡의 씨를 뿌리도록 하라고 했다. 기(棄)를 태(邰)에 봉하고 후직(后稷)이라 부르는 한편 희씨(姬氏) 성(姓)을 내렸다."

 

태(邰)는 어머니 원(原)근본인 태씨(邰氏)가 강성(姜姓)에서 파생되서 시작된 외가(外家)인데, 초기 성씨는 어머니 성을 며느리가 계승합니다. 태(邰)에 봉했다기 보단 그냥 그곳에 살았던 것이고, 희성(姬姓)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강(江) 희수(姬水)에서 살았기 때문에, 초기 성씨는 사는 지역 강이름으로 불렸던 것으로, 태(邰)나라와 희수(姬水)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화하족 유(有)있었다 웅(熊)곰나라 영내에 있는 곳으로, 황하(黃河) 중류 남쪽 신정현에 있습니다.

 

"1세 기(棄)후직이 죽자 아들 2세손 부줄(不窋)이 뒤를 이었다. 부줄 말년 하후씨(夏后氏)의 정치가 쇠퇴해지자 직의 자리를 버리고 일에 힘쓰지 않았다. 부줄은 관직을 잃고 융적(戎狄) 땅(오르도스)으로 달아났다. 부줄이 죽자 아들 3세손 국(鞠)이 섰고, 국이 죽자 아들 4세손 공류(公劉)가 섰다. 공류는 융적의 땅에서 살면서 후직의 일을 다시 일으켜서 밭 갈고 씨 뿌리는 일에 힘쓰고 맞는 땅을 찾아다녔다. 칠수와 저수에서 위수를 건너서는 목재를 얻었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재물이 생겼고, 정착해서 사는 사람은 재산이 쌓였다. 인민들이 그로 인해 복을 누렸다. 백성들이 그를 흠모하여 많은 사람들이 옮겨와 귀의했다. 주의 통치가 이로부터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시인은 그 덕을 사모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공유가 죽자 아들 5세손 경절(慶節)이 이어받아 빈(豳)에 나라를 세웠다. 경절이 죽고 아들 6세손 황복(皇僕)이 섰다. 황복이 죽자 아들 7세손 차불(差弗)이 섰다. 차불이 죽자 아들 8세손 훼유(毁隃)가 섰다. 훼유가 죽자 아들 9세손 공비(公非)가 섰다. 공비가 죽고 아들 10세손 고어(高圉)가 섰다. 고어가 죽고 아들 11세손 아어(亞圉)가 섰다. 아어가 죽고 아들 12세손 공숙조류(公叔祖)가 섰다. 공숙조류가 죽자 아들 13세손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섰다. 고공단보가 다시 후직과 공류의 일을 일으키고 덕을 쌓고 의를 행하자 국인(國人)이 모두 그를 받들었다. 훈육(薰育)과 융적(戎狄)이 공격해와 재물을 얻으려 하자 주었다. 다시 공격해와 땅과 인민을 요구하자 인민들이 모두 노하여 싸우려 했다. 고공은 “인민이 군주를 세우는 것은 이롭기 때문이오. 지금 융적이 공격하여 싸우려는 것은 우리 땅과 인민 때문이오. 인민이 내게 있든 저들에게 있든 뭐가 다르겠소? 인민들이 나를 위해서 싸우면 그들의 아버지와 아들을 죽여서 그들의 군주가 되는 것이다. 나는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소”라 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과 함께 빈을 떠나서 칠수, 저수를 건너고 양산을 넘어서 기산(岐山) 아래에 머물렀다. 빈에 있던 사람들은 나라 전체로 노약자를 부축하고 이끌어 모두 다 기산 아래에 있는 고공에로 돌아왔다. 이웃한 다른 나라도 고공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많이 귀순해왔다. 이에 고공은 융적의 풍속을 없애고 성곽을 쌓고 집을 지어 읍에다 나누어 살게 했다. 다섯 개의 관직과 담당관을 두었다. 인민들이 모두 즐겁게 노래 부르며 그 덕을 칭송했다. 고공단보에게는 큰아들 태백(太伯)과 둘째아들 우중(虞仲)이 있었다. 태강(太姜)은 막내아들 14세손 계력(季歷)을 낳았다. 계력은 태임(大任)을 아내로 맞이했다. 모두 어진 부인들이었다. 15세손 창(昌)이 태어날 때 성스러운 길조가 있었다. 고공은 “우리 세대에 큰일을 일으킬 사람이 있다는데 그게 창이 아닐까”라 했다. 큰아들 태백과 우중은 고공이 계력을 세워서 창에게 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두 사람은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문신을 하고 단발함으로써 계력에게 (임금 자리를) 양보했다. 고공이 죽고 계력이 섰다. 이가 공계(公季)이다. 공계는 고공의 유훈을 잘 닦고 의를 돈독히 행하니 제후가 그를 따랐다."

 

12세손인 태공(太公) = 공조(公祖), 숙류(叔類)가 기산(岐山)으로 이동하기전 빈(豳)을 다스리던 마지막 백(伯)으로, 주(周)나라 1대 성왕의 6대 조상으로, 공(公)은 나라를 세우면 6대조까지 높여 추서하는 것으로, 공후백자남 최고 관작(官爵)이 제왕(帝王)임금 다음인 공(公)으로 오른팔을 뜻한다. 고공(古公) 단부(亶父)가 첫 기산백(岐山伯)이고, 희성(姬姓) 시조(始祖) 후직(后稷) 희(姬) 기(棄)의 15세손(世孫) 기산백(岐山伯) 희창(姬昌)은 주(周)나라 실질적 기틀을 다졌기 때문에 문왕(文王)임금으로 더 높여 부른다. 상(商)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상나라 왕을 죽인 무왕(武王) 희발(姬髮)은 상나라 반격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나라 태자를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주(周)나라 수도 호경(낙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공식적으론 왕(王)임금이 아닌 희성(姬姓)을 대표하는 백(伯)일뿐인 상나라 신하로, 주무왕 사후 아들인 17세손 성왕(成王)이 상나라를 멸하고 주(周)나라를 시작한 공식 1대왕이다. 숙부 네째 주공(周公) 희단(姬旦)이 어린 조카 섭정을 맡아 반란에 대비했는데, 형인 세째 관숙(管叔) 희선(姬鮮)과 동생 채숙(蔡叔) 탁(度)이 주공 단을 의심해서 상나라 무경과 결탁 삼감의 난을 일으켰고, 주공 단에 의해 평정되면서 무경과 관숙을 죽이고 상(商)나라가 공식 멸망했다.

 

화하족이 세운 하(夏)나라를 멸망시킨, 바이칼호 남쪽에 있는 셀렝게강 = 설련하(偰輦河)에서 남하한 유목민, 유(有)있었다 융(娀)의 딸 간적(簡狄)의 자손인 서북방 융적(戎狄) 설(契)이 상(商)나라 시조(始祖)고, 후손 탕왕은 화하족이 세운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상구(商丘)언덕을 수도로 삼았는데, 언덕 초목에 해와 달이 걸려있는 모습 조(朝)아침으로 수도 서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아침 일본말이 '아사'고, 언덕에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달동네, 햇볕이 비추는 양(陽)달, 햇볕이 비추지 않는 그늘진 곳을 음(陰)달이라고 한다. 단군(檀君) 수도 아사달은 햇볕이 비추는 언덕이란 뜻과 양(陽)볕인 해와 달리 음(陰)그늘인 월(月)달이 공존하는 때가 조(朝)아침이다.

 

상나라는 주변 노예국들에게 패(貝)화폐와 공(工)장인이 만든 특산품 공(貢)돈을 스스로 수도 조(朝)로 가져다 바치는 조공(朝貢)을 정한 금액, 정한 날짜까지 바치도록했는데, 화폐는 별보배고둥 조개껍질 갯수를 세면 되지만, 제각각 다른 특산품은 동굴밖에 호랑이가 있다고 구(口)입 3명이 말하면 호랑이가 있는 품격(品格) 상품값이 다르므로, 상(商)나라 사람 상인(商人) 3명이 격(格)평가 합의한 상품(商品)값 돈이 정(正)바르지 않은 족읍(族邑)들은 복(攵)기마대를 보내 몰살시키는 조정(朝政)했습니다. 상(商)나라 수도 조(朝)로 전국 각지 노예국들이 조공(朝貢)바치러 길이 생기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목(木)나무가 성장하는 모습 업(業), 상업(商業)의 본 뜻입니다. 화하족 주(周)나라에 망한 상(商)나라를 계승한 것이, 상나라 왕실 자성(子姓)에서 파생된 서자 기씨(箕氏) 서여(胥餘)로, 살던 백적(白狄)지역에서 어(魚)물고기 잡고 양(羊)양치던 유목민 선(鮮)을 이끌고 요하에 있던 단군 아사달 = 조양(朝陽)으로 상나라 수도 서울 조(朝)를 이동한 조선(朝鮮)으로, 수도 조(朝)를 이동한 것은 상(商)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에 미자 계 송나라처럼 승복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상나라 서(西)서쪽 기산(岐山) 노예를 대표하는 백(伯) 조공국 주(周)나라 문왕(文王), 서백(西伯) 희(姬) 창(昌)이 상나라 조공에 불만을 품고 사람을 모으는 불온한 모습을 상나라가 호(虎)호랑이 지역을 감시하려 후(侯)관리를 숭(崇)에 배치한 사람이 상나라 왕에게 알렸고, 서백은 상나라로 끌려가 7년 동안 유리성에 갇혔고, 백읍(伯邑)을 아버지 대신 다스리던 적장자(嫡長子)도 상나라 왕에게 끌려가 죽으면서, 기산 가신들이 조공(朝貢)과 함께 미녀들을 바치면서 서백은 겨우 풀려납니다. 현실을 체감한 서백은 풀려난 후 서백이 다스리던 땅 일부와 조공을 상나라 왕에게 바쳤고, 요구하지도 않은 조공을 바친 충심?에 속아 감동한 상나라 왕은 서백에게 군권을 상징하는 도끼 부월을 하사하면서, 너를 고발한 것은 숭후호라고 알려줬습니다. 서백후(西伯侯) 희창(姬昌)은 강태공(姜太公) 여씨(呂氏) 상(尙)을 군사로 영입 주변 제후들을 토벌 영지를 확장 주(周)나라 기틀을 다지고 사망했고, 둘째 아들 태자 희발 무왕이 아버지 유지를 받들어 상(商)나라를 토벌했습니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18명의 아들을 뒀는데, 적처(嫡妻) 태사(太姒)와 사이에 10명의 아들을 뒀고, 강(康)씨 뿌리가 되는 16세손 위강숙 희(姬) 봉(封)은 아홉째 아들이다. 강(康)씨는 주 문왕(周 文王) 희(姬) 창(昌)의 적처(嫡妻) 태사(太姒)의 둘째 아들 주 무왕(周 武王)때 희봉(姬封)의 분봉국은 강(康)나라로, 희봉(姬封)은 조카 성왕 때, 주(周)나라 5단계 관작(官爵)인 공후백자남(公候伯子男)중에서 후(候) 관작(官爵), 강후(康候)로 불렸고, 성왕의 숙부란 뜻인 강숙(康叔)으로 불렸는데, 삼감의 난(三監-亂)을 주공 단(周公 旦)이 평정한 후, 상(商)나라 수도 조가(朝歌)지역에 위(卫=衞)나라를 세웠고, 희봉(姬封)을 위후(衞候)로 분봉하면서, 주 성왕(周 成王)의 숙부, 위강숙(衛康叔)으로 불리게 됐다.

 

강(康)나라, 위(衛)나라가 생긴 것으로, 왕실 성(姓)은 희성(姬姓)이지만, 나라가 망하면 대종(大宗) 적(嫡)정실 자녀들은 망한 나라 이름 강씨(康氏) 위씨(衛氏)로 불리게 되는데, 위(衛)나라를 창업한 것이 강(康)나라를 창업한 시조(始祖) 희봉(姬封)이기 때문에, 위강숙 위(衛)나라를 계승한 적자(嫡子) 계통은 위씨(衛氏)가 되는 것이고, 어머니 씨(氏)가 다른 서자(庶子) 계통은 다른 성(姓)을 창성(創姓)하게 되는데, 주(周)나라는 전국 각지에 과녁에 화살을 쏘듯이 모내는 사람 후(侯)를 친족으로 상나라를 감시하려 배치한 것이 왕(王)임금으로 씨(氏)가 됐기 때문에, 적서(嫡庶)로 성씨가 나뉜 것이 아닌, 분봉(分封) 지역이 성씨를 나뉘는 기준이 된다.

 

위(卫=衞)나라 왕실 대종(大宗) 성(姓)은 적장자(嫡長子)인 백모(伯牟=伯髦)가 계승 희성(姬姓) 위씨(衛氏) 시조가 됐다. 위강숙(衛康叔)은 형인 주공 단(周公 旦)의 충고인 강고(康誥)에 따라서, 주周나라가 멸망시킨 상(商)나라 왕족인 기자(箕子)에 대한 반란 예방 감시가 필요했고, 위강숙 둘째 아들이 기자(箕子)가 있던 평양(平壤=양평壤平),현재 요양시)에 왔고, 기자(箕子)가 강씨(康氏) 성(姓)을 하사하고 건국 공신으로 임명했다고 신천강씨 상계에 기록돼있다.

 

서쪽 노예국 주나라는 주인국 상나라에 BC1122년 반란 성공을 시작으로 BC1043년 발생한 삼감의난을 3년 걸려서 상나라 재기 시도를 완전 평정한 BC1046년 건국 시점이 유동적인 이유는, 주무왕 반란이 역성혁명을 앞세우지 않았고, 상나라 왕실을 존속시켰기 때문에, 상나라가 완전 망한 시점을 BC1046년으로 보고, 주나라 건국 시점으로 본다. 상나라 왕족 기자는 왕족 대접받던 BC1122년에 평양으로 이동했고, 상나라 사람들은 BC1046년부턴 강제 이주 사민정책 노예로 전락했다.

 

한국 신천강씨 대종회 중국 강(康)씨와 교류 조사 내용에 따르면, 중국 길림성 금주국사-중국 국가 박물관에 소장된 서주시대 초기 청동기, 군권을 상징하는 강후부(康候斧)가 출토되면서 강후(康候)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희성(姬姓) 강씨(康氏)는 강후(康候)에 뿌리가 있다. 모(髦)는 어릴 때 짓는 아명(兒名)으로, 보통 한 글자만 짓고, 백(伯)중(仲)숙(叔)계(季)현(顯)혜(惠)아(雅達)유(幼)를 순서대로 붙인다. 따라서 둘째 아명은 중모(仲髦)가 되고, 성인이 되는 관례(冠禮)후 관명(冠名)이나 관작(官爵), 또는 별호(別號)로 불리게 된다. 위강숙의 둘째 중모(仲髦)는강(康)나라 출신으로, 위강숙에 의해 파견된 후(候)관리로 배치됐기에 기자로부터 강후(康候)로 불린것으로 생각된다.

 

이름하나 짓고 백중숙계 순서대로 붙이는 것은 삼국시대 풍습이고, 희창의 적자 10명 이름이 고, 발, 선, 단, 도, 진탁, 무, 처, 봉, 재, 모두 다른 것을 참고하면, 강성(康姓) 시조 중모는 알려진 적장자 위나라 2대 왕 이름 모(髦)를 근거로 한 추측일 뿐, 이름 후(侯)가 관작인지 관명인진 족보처럼 상세한 정보없는 상계기 때문에 불분명하다.

 

다른 혈통 강씨(康氏)는 부여(扶餘,夫餘) 예맥(濊貊) 월지(月氏, 月支)와 연결 고리가 있는 강국(康國) 소무구성(昭武九姓)에서 파생된 강씨(康氏)로, 기원전 국가들은 나라가 망하면 국명(國名)을 왕실 성(姓)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강국(康國) 왕실 성(姓)으로 알려진 온(溫)성(姓) 적장자(嫡長子) 대종(大宗)계통이 나라가 망하면서 강씨(康氏) 성(姓)을 쓰게 됐다면 강씨(康氏)는 2가지 이상 다른 혈통(중국의 강성(康姓)참조)존재 할 수 있다.

 

안록산(安禄山)의 친부는 강씨(康氏)로 언급되고 있고, 후조를 세운 석씨가 강성(康姓)에서 파생된 성씨로 중국에선 분류하고 있는데, 흉노 지배를 받던 갈족은 부여 대소왕 동생이 세운 갈사국에 뿌리가 있고, 따라서 안(安) 석(石)씨는 강씨일 수 있다. 참고할 점은 단군조선이 연나라 침공으로 요하를 뺏기고 평양으로 남하한 단군과 달리 옛만리장성 천리밖 만주에 조선(朝鮮)창업자 부(夫)사내 여(餘)를 국호로 계승했고, 상(商)나라 달력을 사용 시조(始祖)를 계승한 것이다. 강성(康姓) 시조가 기자로부터 출신지 강(康)으로 불리며 건국 공신 관작을 받고 단군이 평양을 위장귀순한 위만에 속아 뺏기고 해로를 따라 남하 한(韓)을 세우고 망할 때까지 호족으로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부여에서 파생된 소무구성 강씨가 희성 강씨와 전혀 무관한 존재로 단정할 순 없다.

 

한국의 강씨(康氏)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1,625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56위이다. 본관은 신천, 곡산, 재령, 충원, 제주, 진주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하나,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건국(建國) 외가 6선대조(先代祖)라 시조(始祖)가 된 강호경(康虎景)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있고, 강호경(康虎景)은 주 문왕(周 文王) 희(姬) 창(昌)의 손자인 희성(姬姓) 강씨(康氏) 득성조 강후(康候)의 68세손으로, 어릴 때 아명(兒名)은 강기(康騎), 강호경(康虎景)은 관명(冠名)이다. 고려 태조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 작제건(作帝建), 작제건(作帝建)의 아버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작제건(作帝建)의 어머니이자 왕건의 증조모 정화왕후(貞和王后) 강한진의(康韓辰義) 아버지인 강보육(康寶育)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존했고, 강보육(康寶育)의 조부 강호경(康虎景)을 국조대왕(國祖大王)으로 추존(追尊)했고, 신천강씨는 강보육(康寶育)의 형인 강보전(康寶甸)의 후손이다.

 

성씨(姓氏)는 성(姓)에서 분가 독립하면 씨(氏)를 창성(創姓)하는 것이 본질이고, 새 국가를 세우면 보통 6대조 까지 왕으로 추존하는데, 태조 왕건 알려진 부계 조상은 작제건 3대기 때문에, 외가 6대조 강호경이 국조가 된 것이다. 성씨가 바뀌는 이치와 새 왕조 6대조 추봉을 모르면, 왜 강씨가 왕씨 국조?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강태공(姜太公) 별호가 그뜻을 알려줍니다. 강태공 이름은 상(尙) 성(姓)은 강성(姜姓) 여씨(呂氏)로, 여상인데, 큰 인물이기 때문에 소종 여씨보단 대종 강성으로 불리는 것이고, 태공(太公)은 강상의 작위가 아니라, 주나라를 공식 건국한 주성왕으로부터 6대조 조상을 왕으로 추서한 시호가 태공(太公)이고, 주무왕 희발의 아버지 주문왕 희창이, 강상을 만나 영입할 때, 태공때부터 기다린 현자를 이제서야 만났다 해서, 강태공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강(康)씨와 왕(王)씨는 글자가 다르지만 같은 성씨 혈통일 수 있고, 새 왕조를 세운 왕건 6대조는 외 6대조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강보육(康寶育)은 손호술(損乎述)로 불렸고 개명했다. 신천강씨 가계도엔 아버지 강충(康忠)아들은 보전(寶甸) 보육(寶育) 2명으로, 이제건(伊帝建)은 없다. 강보전(康寶甸)의 별호로 보인다.

 

고려 태조 22번째 신주원부인 아버지인 7세손 강태주(康泰周)와 둘째 아들 8세손 강조(康兆)가 고려 목종 퇴위, 김치양을 죽이고 대량원군을 세우면서 거란이 세운 요나라 성종이 정변을 구실 삼아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 전투에서 패하면서, 처형됐고, 이후 목종 퇴위 역적으로 몰리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몽고 침입으로 고종(高宗)이 강화도로 몽양 할 때,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관력(官力)이 뚜렷한 중시조(中始祖)14세손 강지연(康之淵)공이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에 봉해지면서, 신성(信城)=신천(信川)이 본관이 됐고, 평강파(平康派)가 강지연(康之淵)공의 적장자(嫡長子) 대종(大宗)이다.

 

16세손 강원(康遠)의 세째 아들인 17세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득함(康得咸)의 큰 손자 19세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서(康庶)를 파조로 모시는 상산(象山)= 곡산파(谷山派)를 이루고, 적장자(嫡長子) 강윤귀(康允貴) 후손인 평양파(平壤派)가 대종(大宗)이다.

 

강서(康庶)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신덕왕후 아버지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20세손 강윤성(康允成)의 적장자(嫡長子) 21세손 강득룡(康得龍)이 조선이 개국 되자 불사이군, 고려조에 충절을 지키기 위해 낙향하자, 조선 태조가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하고, 안정공(安靖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21세손 강득룡(康得龍) 후손인 안릉(安陵)=재령파(載寧派)를 이루는 3본은 같은 혈통이고, 강지연(康之淵)공의 후손은 57개 분파가 있다. 평안남도, 평안북도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한국 신천강씨 대종회는 매년 10월 3일 과천에서 세향제를 지낸다.

 

신천강씨 시조인 강호경(康虎景)을 성(姓)을 뺀, 호경(虎景)으로 부르려는 시도가 있다. 강씨(康氏) 시조 성씨를 빼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 상계가 불 분명한데다. 외가로 보이는 강보육(康寶育)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씨와 시대 상황을 고려 후기와 현대 상황에 꿰 맞추려 하기 때문에, 혈통이 불편해 보이기 때문으로, 2가지 이해 해야 할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성(姓)은 나라를 창건하면 소종(小宗)인 씨(氏)로 새 성(姓)을 창성(創姓)하는 것이 성씨(姓氏)란 것으로, 후기 국가로 오면서 분파로 구분 바꾸지 않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강충의 두 아들은 신라 시대 사람으로, 신천강씨 직계 조상 기록인 상계에 따르면, 관작 이동이 마한(馬韓)-강주(康州)=(가야(伽倻))-신라(新羅 흐름으로 벼슬이 기록돼있고, 마한 왕실이 백제에 망한 후 일정 기간 동안 강주 지역엔 가야가 있었다. 신라에서 첫 벼슬은 이벌찬으로 기록돼있고, 이벌찬은 성골귀족이 받는 벼슬이다. 신천강씨가 북쪽인 평양 인근에 정착하게 된 것은, 김유신 고구려 정벌 때 58세손 강치상( 康致祥)이 총관(總管)으로 참전한 것이 평양, 신천 지역 토착 호족이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태봉국 김궁예(金弓裔) 왕후 강비(康妃)의 아버지 강연창(康衍昌)은 강호경(康虎景)의 6세 손이다. 신라가 망할 때부터 태봉국까지, 강호경 후손은 신라에서 관직을 했다. 신라는 사로 6촌장 = 왕이 6명인 형태로, 씨족 권력을 지키기 위한 진골 성골 귀족이 존재했고, 신라가 망할 때 근친 혼인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해 죽은 뒤에 추봉되는 갈문왕(葛文王)이 있었다. 강보육(康寶育)의 부인은 형인 강보전(康寶甸)의 딸인 조카 강덕주(康德州)다. 강보육(康寶育)의 딸 강한진의(康韓辰義) 아들은 작제건(作帝建)이고, 강보전(康寶甸)의 별호는 김관의 편년통록을 참고하면 이제건(伊帝建)으로 보인다. 신라 시대엔 어색한 일이 아니였지만, 고려 중기 송나라와 교류하면서, 성씨(姓氏) 부계 가족내 혼인을 금기시 하는 송(宋)나라 문화를 숭상하는 문신들 영향인데, 우리 언어가 바이칼호 알타이 퉁구스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은 북방 유목민 피가 흐른다는 뜻이고, 유목 북방계 성씨는 어머니가 성(姓)나라 중심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며, 모계 기준으로 보면 다른 가족이 된다. 주周 무왕武王~주 성왕 삼감의 난 발생전 9남 희姬 봉封은 강康국에 봉해져 강康숙叔(성왕의 강국 숙부)으로 불렸고, 삼감의 난 평정후 형인 섭정 주공 단은 반란 상나라 지역을 위卫(=衛)와 송宋, 둘로 나눴고, 송나라는 상商왕족 미자 계를 봉했고, 상商나라 수도 조가가 있는 위卫나라는 강康숙 희姬봉封을 봉했다.

 

강씨(康위씨(衛氏)의 부모가 되는 성(姓)은 주(周)나라 왕실 성(姓)인 희(姬)로, 시조(始祖)는 위강숙(衛康叔) 봉(封)이고, 적장자(嫡長子) 계통인 대종(大宗)이 위씨(衛氏), 차남 계통 소종(小宗)이 강씨(康)인데, 특별한 점은 강씨(康)가 먼저 생겼고, 위씨(衛氏)가 나중에 생긴 것이다.

 

한국 신천강씨 대종회 중국 강(康)씨와 교류 조사 내용에 따르면, 중국 길림성 금주국사-중국 국가 박물관에 소장된 서주시대 초기 청동기, 군권을 상징하는 강후부(康候斧)가 출토되면서 강후(康候)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희성(姬姓) 강씨(康氏)는 강후(康候)에 뿌리가 있고, 한국의 강씨는 위강숙 둘째 아들 후손들이다.

 

모(髦)는 어릴 때 짓는 아명(兒名)으로, 보통 한 글자만 짓고, 백(伯)중(仲)숙(叔)계(季)현(顯)혜(惠)아(雅達)유(幼)를 순서대로 붙인다. 따라서 둘째 아명은 중모(仲髦)가 되고, 성인이 되는 관례(冠禮)후 관명(冠名)이나 관작(官爵), 또는 별호(別號)로 불리게 된다. 위강숙의 둘째 중모(仲髦)는강(康)나라 출신으로, 위강숙에 의해 후(候)로 배치됐기에 기자로부터 강후(康候)로 불린것으로 생각된다.

 

이름하나 짓고 백중숙계 순서대로 붙이는 것은 삼국시대 풍습이고, 희창의 적자 10명 이름이 고, 발, 선, 단, 도, 진탁, 무, 처, 봉, 재, 모두 다른 것을 참고하면, 강성(康姓) 시조 중모는 알려진 적장자 위나라 2대 왕 이름 모(髦)를 근거로 한 추측일 뿐, 이름 후(侯)가 관작인지 관명인진 족보처럼 상세한 정보없는, 주본기처럼 직계조상 흐름만 기록한 상계기 때문에 주본기와 똑같은 이유로 정확하진 않다.

 

다른 혈통 강씨(康氏)는 부여(扶餘,夫餘) 예맥(濊貊) 월지(月氏, 月支)와 연결 고리가 있는 강국(康國) 소무구성(昭武九姓)에서 파생된 강씨(康氏)로, 기원전 국가들은 나라가 망하면 국명(國名)을 왕실 성(姓)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강국(康國) 왕실 성(姓)인 온(溫)성(姓) 적장자(嫡長子) 대종(大宗)계통이 나라가 망하면서 강씨(康氏) 성(姓)을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강씨(康氏)는 2가지 이상 다른 혈통(중국의 강성(康姓)참조)존재 할 수 있다. 안록산(安禄山)의 친부는 강씨(康氏)로 언급되고 있고, 후조를 세운 석씨가 강성(康姓)에서 파생된 성씨로 중국에선 분류하고 있는데, 흉노 지배를 받던 갈족은 강국(康國)에 뿌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안(安) 석(石)씨는 희성강씨와 혈통이 다른 것으로 보이는데, 참고할 점은 기자 이름 서여(胥餘) 여(餘)가 부여와 글자가 같은 것, 강성(康姓) 시조가 기자로부터 출신지 강(康)으로 불리며 건국 공신 관작을 받고 망할 때까지 호족으로 살았기 때문에, 부여에서 파생된 소무구성 강씨가 희성 강씨와 전혀 무관한 존재로 단정할 순 없다. 

 

한국의 강(康)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1,625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56위이다. 본관은 신천, 곡산, 재령, 충원, 제주, 진주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하나, 고려 태조 왕건의 외가 6대조인 강호경(康虎景)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있고, 강호경(康虎景)  주 문왕(周 文王) 희(姬) 창(昌)의 손자인 희성(姬姓) 강씨(康氏) 득성조 강후(康候)의 68세손으로, 어릴 때 아명(兒名)은 강기(康騎), 강호경(康虎景)은 관명(冠名)이다.

 

고려 태조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 작제건(作帝建), 작제건(作帝建)의 아버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작제건(作帝建)의 어머니이자 왕건의 증조모 정화왕후(貞和王后) 강한진의(康韓辰義) 아버지인 강보육(康寶育)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존했고, 강보육(康寶育)의 조부 강호경(康虎景)을 국조대왕(國祖大王)으로 추존했다. 신천강씨는 강보육(康寶育)의 형인 강보전(康寶甸)의 후손이다.

 

성씨(姓氏)는 성(姓)에서 분가 독립하면 씨(氏)를 창성(創姓)하는 것이 본질이고, 새 국가를 세우면 보통 6대조 까지 왕으로 추봉하는데, 태조 왕건 알려진 부계 조상은 작제건 3대기 때문에, 외가 6대조 강호경이 국조가 된 것이다. 성씨가 바뀌는 이치와 새 왕조 6대조 추봉을 모르면, 왜 강씨가 왕씨 국조?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강태공(姜太公) 별호가 그뜻을 알려줍니다. 강태공 이름은 상(尙) 성(姓)은 강성(姜姓) 여씨(呂氏)로, 여상인데, 큰 인물이기 때문에 소종 여씨보단 대종 강성으로 불리는 것이고, 태공(太公)은 강상의 작위가 아니라, 주나라를 건국한 주무왕으로부터 6대조 조상을 왕으로 추봉한 시호가 태공(太公)이고, 주무왕 희발의 아버지 주문왕 희창이, 강상을 만나 영입할 때, 태공때부터 기다린 현자를 이제서야 만났다 해서, 강태공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강(康)씨와 왕(王)씨는 글자가 다르지만 같은 성씨 혈통일 수 있고, 새 왕조를 세운 왕건 6대조는 외 6대조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강보육(康寶育)은 손호술(損乎述)로 불렸고 개명했다. 신천강씨 가계도엔 아버지 강충(康忠)아들은 보전(寶甸) 보육(寶育) 2명으로, 이제건(伊帝建)은 없다. 강보전(康寶甸)의 별호로 보인다.

 

고려 태조 22번째 신주원부인 아버지인 7세손 강태주(康泰周)와 둘째 아들 8세손 강조(康兆) 고려 목종 퇴위, 김치양을 죽이고 대량원군을 세우면서 거란이 세운 요나라 성종이 정변을 구실 삼아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 전투에서 패하면서, 처형됐다. 이후 목종 퇴위 역적으로 몰리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몽고 침입으로 고종(高宗)이 강화도로 몽양 할 때,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관력(官力)이 뚜렷한 중시조(中始祖)14세손 강지연(康之淵)공이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에 봉해지면서, 신성(信城)=신천(信川)이 본관이 됐다. 평강파(平康派)가 강지연(康之淵)공의 적장자(嫡長子) 대종(大宗)이다.

 

16세손 강원(康遠)의 세째 아들인 17세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득함(康得咸)의 큰 손자 19세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서(康庶)를 파조로 모시는 상산(象山)= 곡산파(谷山派)를 이루고, 적장자(嫡長子) 강윤귀(康允貴) 후손인 평양파(平壤派)가 대종(大宗)이다.

 

강서(康庶)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 태조 이성계 신덕왕후 아버지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20세손 강윤성(康允成)의 적장자(嫡長子) 21세손 강득룡(康得龍)이 조선이 개국 되자 불사이군, 고려조에 충절을 지키기 위해 낙향하자, 조선 태조가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하고, 안정공(安靖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21세손 강득룡(康得龍) 후손인 안릉(安陵)=재령파(載寧派)를 이루는 3본은 같은 혈통이고, 강지연(康之淵)공의 후손은 57개 분파가 있다.

 

평안남도, 평안북도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한국 신천강씨 대종회는 매년 10월 3일 과천에서 세향제를 지낸다.

신천강씨 시조인 강호경(康虎景)을 성(姓)을 뺀, 호경(虎景)으로 부르려는 시도가 있다. 강씨(康氏) 시조 성씨를 빼려는 이유는 분명하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 상계가 불 분명한데다. 외가로 보이는 강보육(康寶育)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씨와 시대 상황을 고려 후기와 현대 상황에 꿰 맞추려 하기 때문에, 혈통이 불편해 보이기 때문으로, 2가지 이해 해야 할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성(姓)은 나라를 창건하면 소종(小宗)인 씨(氏)로 새 성(姓)을 창성(創姓)하는 것이 성씨(姓氏)란 것으로, 후기 국가로 오면서 분파로 구분 바꾸지 않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강충의 두 아들은 신라 시대 사람으로, 신천강씨 직계 조상 기록인 상계에 따르면, 관작 이동이 마한(馬韓)-강주(康州)=(가야(伽倻))-신라(新羅 흐름으로 벼슬이 기록돼있고, 마한 왕실이 백제에 망한 후 일정 기간 동안 강주 지역엔 가야가 있었다. 신라에서 첫 벼슬은 이벌찬으로 기록돼있고, 이벌찬은 성골귀족이 받는 벼슬이다. 신천강씨가 북쪽인 평양 인근에 정착하게 된 것은, 김유신 고구려 정벌 때 58세손 강치상(

康致祥)이 총관(總管)으로 참전한 것이 평양, 신천 지역 토착 호족이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태봉김궁예(金弓裔) 왕후 강비(康妃)의 아버지 강연창(康衍昌)은 강호경(康虎景)의 6세 손이다. 신라가 망할 때부터 태봉국까지, 강호경 후손은 신라에서 관직을 했다. 신라는 사로 6촌장 = 왕이 6명인 형태로, 씨족 권력을 지키기 위한 진골 성골 귀족이 존재했고, 신라가 망할 때 근친 혼인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해 죽은 뒤에 추봉되는 갈문왕(葛文王)이 있었다. 강보육(康寶育)의 부인은 형인 강보전(康寶甸)의 딸인 조카 강덕주(康德州)다. 강보육(康寶育)의 딸 강한진의(康韓辰義) 아들은 작제건(作帝建)이고, 강보전(康寶甸)의 별호는 김관의 편년통록을 참고하면 이제건(伊帝建)으로 보인다. 신라 시대엔 어색한 일이 아니였지만, 고려 중기 송나라와 교류하면서, 성씨(姓氏) 족내혼을 금기시 하는 송(宋)나라 문화를 숭상하는 문신들 영향으로 고려 왕조 상계는 불편한 진실이 됐다.

 

신천강씨 57개 분파도

 

신천信川 강씨康氏 57개 분파도(수정)
대한민국 강씨康氏는 거의 대부분 신천강씨信川康氏로,시조 강호경康虎景의 후손이며, 중시조 14세손인 강지연康之淵 공의 후손들로, 매년 10월 3일 경기도 과천에서 중시조 세향제를 지낸다.

 

고려의 국조와 관련 있는 내용 링크

  • 고려의 역대 국왕 = 추존된 왕을 보면,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의조 작제건은 직계 조상이니 당연해 보이는데, 국조는 작제건 어머니 정화왕후 (貞和王后)  강한진의(康韓辰義)의 아버지인 강보육(康寶育)을  국조(國祖)로 표시하고 있다. 손호술(損乎述)로 표시하고 있는데, 김관의 편년통록은 왕국조는 손호술(損乎述)이며 보육(寶育)으로 나중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의조로 추정되는 작제건의 외조부라 하였다. 이제현의 사론에 따르면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에는 말하기를 왕국조는 태조의 증조모 정화왕후는 왕국조의 왕후라고 하였다. 또 《성원록(聖源錄)》에는 말하기를 보육성인(寶育聖人)이라는 자는 원덕대왕의 외조부라고 하였다."라 하여 김관의의 설을 부정하였다. 정화왕후 강씨가 강보육의 딸이라면 국조는 보육이 될 수가 없다.

당연한 얘기로, 아버지를 남편으로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 안되는 것인데,

김관의(金寬毅)는 그의 책 편년통록에서 강충이 두 아들을 낳아 이제건, 강보육이라 했는데, 강보육은 일찍이 곡령에 올라 남쪽을 향하여 오줌을 누었더니, 삼한의 산천이 은빛 바다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다음날 보육은 그의 형 이제건에게 말했더니 이제건이 꿈을 해몽하며, “너는 큰 인물을 낳으리라” 하고 그의 딸 덕주를 아내로 삼아 뒤에 두 딸을 낳았다. 이제건은 딸 덕주가 있었고 보육에게는 딸만 둘 있었는데 그 중 둘째딸 진의는 언니의 꿈을 산 뒤 고려 국조 또는 당 숙종(또는 당나라 선종)과 동침하여 작제건을 낳았다고 한다.

이제건의 딸 덕주는 그의 친정어머니이면서 사촌언니가 된다. 작제건은 왕건의 할아버지이다. 뒤에 증손자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정화왕후로 추존하였다.

고려사절요에서는 국조의 비(妃)를 정화왕후로 기록하고 있고, 고려사에서는 정화왕후를 강보육의 딸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국조를 강진의의 친정아버지인 보육이라고 하는 설이 있어서 이 설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한 정화왕후의 아들인 의조의 아버지를 당 숙종과 정화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은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를 인용하며 의조(작제건)의 아버지가 당 숙종이라는 이야기를 허구로 규정하였다.

김관의가 쓴 편년통록 내용에서 강충의 두 아들로 이제건과 강보육을 표현은 신천강씨 족보와 강보육, 두 아들, 작제건의 외조부, 3가지가 일치하고, 이제현의 사론에 따르면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에는 말하기를 왕국조는 태조의 증조모 정화왕후는 왕국조의 왕후라고 하였다. 또 《성원록(聖源錄)》에는 말하기를 보육성인(寶育聖人)이라는 자는 원덕대왕의 외조부라고 하였다."

이제현의 사론이 인용하는 왕대종족기는 왕국조가 누군지 언급하지 않고 있고, 성원록에서 보육성인(寶育聖人)이 국조인 원덕대왕의 외조부라는 것은, 자체 모순 틀린 얘기로, 신천강씨 족보를 보면, 보육은 정화왕후의 아버지로 표시돼있다. 정화왕후 남편의 외조부란 얘긴데, 남편이 누군지도 불분명한데, 남편의 아버지와 어머니 외가를 어떻게 알 수 있나? 신천강씨 족보상 성원록은 오류가 100%입니다. 고려사에서 정화왕후를 강보육의 딸로 기록한 것은 신천강씨 족보와 일치하고, 국조가 보육이라는 것을 설일 뿐이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강충의 아들은 강보전 강보육 2명 뿐이란 것이고, 강보육은 편년통록에 따르면 강보전으로 생각되는 이제건의 딸인 조카 강덕주를 부인으로 삼았고, 강보육은 딸만 둘 있었는데, 강덕주의 딸이란 언급은 없으며, 남편인 강보육의 딸로만 기록돼있다. 이제현은 당숙종 설이 허구란 것을 증명한 것이지, 국조가 누군지를 규정하지 않았다. 또, 강보전으로 생각되는 이제건과 의조 작제건(作帝建), "제건" 일치 되는 것을 보면, 국조(國祖)는 강보육이 아닌 강보전일 가능성 있다. 정화왕후가 강덕주의 딸이란 명시된 것이 없는 것을 보면, 강보전 강보육 형제는 별호로 생각되는 손호술, 이제건 관련 내용을 참고하면 별호가 이제건인 강보전 국조인 원덕대왕일 수 있다. 국조가 강보전이던 강보육이던, 변하지 않는 사실은 강씨(康氏)란 것으로, 강성왕씨(氏)는 성씨(氏)가 분파 구분으로 바뀌지 않는 후기와 달리, 옛날엔 성씨가 바뀌었고, 성()에서 씨(氏)로 바뀌는 시점이, 가문이 있는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새 일가를 이뤘을 때, 나라를 창업했을 때, 지역을 분할 받아 왕으로 분봉 됐을 때, 나라 왕실이 망했을 때입니다.

 

당 선종(唐宣宗, 810년 ~ 859년)은 (唐)의 제16대 황제(재위 : 847년 ~ 859년)이다. 13살 823년에 궁을 떠났고, 847년 재위했으니, 24년 사이에 작제건을 만들었다는 얘기, 왕륭은 877년 왕건을 나았으니, 적어도 20살은 넘었을 테고, 그럼 857년, 작제건이 20살에 왕륭을 낳았다면 837년, 국조가 20살에 작제건을 낳았다면 817년, 당 선종 7살 정도? 즉위하기 전 출가해 중이 되어 하남(河南)의 절천(淅川)에 있던 엄사()라는 절에 피신해서 법명을 양준(琼俊)이라 하였는데, 절천 향엄사는 중국 서쪽 끝에 있는 절로, 비행기가 없던 그 시절에 7살 어린 나이에 한국까지 올 순 없고, 신라에서 성골 벼슬 했던 지역 호족 신천강씨가 많아야 7살 어린 소년에게 딸을 내줬을까? 7살도 20살에 아들을 출산했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나이, 따라서 중국 기록에도 없는 당 선종 국조 설은 

고려 후기 송나라 성씨 문화 유입, 어색해진 족내혼을 덮기 위한 전설일 뿐이다.

 

고려 추존왕 국조가 강씨던 왕씨던, 달라지지 않는 사실은, 왕씨 부계 조상이 작제건 윗대가 뚜렷하지 않은 지역 호족 기반이 없다는 사실, 그런 작제건-용건-왕건 왕씨 3대를 뒷받침 할 호족은 외가인 강씨 밖에 없다는 사실, 신천강씨 족보에 왕건 이름 올라와 있다는 자체가 바뀌는 성씨 특성을 고려하면, 강성왕씨(氏)는 유전적으로 확인해 볼 필요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강씨(康氏)

위강숙(康叔) 희성(姬姓)에서 파생된 강씨(氏) 성씨(氏)가 있고, 사마르칸트에 진출한 강국(國) 소무구성(昭武九姓) 왕실 성(姓)인 온성(溫)에서 파생된 강씨(氏), 돌궐, 선비, 소그드, 만주족, 부여, 만주지역과 관련 있는 국가들은 강씨(氏)와 연결 고리가 있는 중앙아시아 유목 혈통에 뿌리가 있다.  안녹산의 계부 안씨(安氏), 친부 강씨(氏)는 모두 소무구성 강국(國) 온() 안() 조() 석() 미() 하() 심() 무지(戊地) 사()에 포함돼있고, 나라가 망하면 왕실 대종(宗) 성(姓)

은 보통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쓴다. 소무성은 중국 서쪽 간수성에 있는 거리가 먼 지역이지만, 장사를 잘하는 특징 있고, 공통 분모가 있는 온성(溫)은 온조(溫祚) 고구려 전신인 부여와 연결 고리가 있는 백제 왕이고, 온달(溫達) 고구려 장군이 존재, 무관할 수 없다. 동부여(東夫餘) 대소왕 막내 동생 갈사왕 세운 갈사국(曷思國, 22년~68년)은 갈사수(曷思) 가에 세운 나라이다. 갈족羯族말갈(靺鞨), 갈曷어찌, 강가에 있는 돌 자갈=석씨(), 후조(後趙)을 세운 석륵은 흉노 갈족으로, 갈이 돌을 뜻하므로 석(石)씨가 되었다. 갈족은 흉노족이 아닌, 지배를 받던 만주 지역 혈통인데, 중국이 구분하지 못한 것으로, 동부여 대소왕 동생이 압록강에 이르러 세운 것에 뿌리가 있고, 학자들은 부여가 음차만 따서 썼기 때문에, 부여는 실제론 한자를 제대로 쓰지 않았다지만, 갈(曷)어찌 글자가 보이는 국가나 지역 이름엔 소무구성 성씨들이 존재하고 있다. 강국(國)은 부여 보다 나중에 생긴 국가로, 중앙 아시아 지역에 흉노가 팽창하면서, 월지가 패배 지배 당하거나 밀려나면서 동서로 갈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희성(姬姓) 강씨(氏), 온성(강씨(氏) 2계통이 있습니다.

 

주 문왕(周 文王) 서백 희姬 창昌

18명의 아들을 뒀고, 본처 태사(太姒) 형제는 10명,
1 백읍(伯邑) 고(考) : 상商나라 왕 제신(帝辛)이 문왕 희창을 유리에 있는 성에 가뒀을때 죽여 죽을 쒀 먹였다.
2 주周무왕(武王) 발(發) : 당, 진, 위, 한, 정, 공손, 석, 주나라가 망할 때  주(周) 씨로 바꿨다. 

3 관숙(管叔) 선(鮮) : 관(管) 삼감의 난 가담 (망한 상나라 태자 무경 감시자, 동생 주공 단에 불만 무경과 함께 반란), 반란 진압 후 처형 됨
4 주공(周公) 단(旦) : 노(魯), 계손, 숙손, 맹손, 공(公) (주 무왕 사후, 성왕 섭정, 삼감의 난 평정)
5 채숙(蔡叔) 도(度) : 채(蔡) 삼감의 난 가담 (망한 상나라 태자 무경 감시자, 주공 단 불만 무경과 함께 반란), 반란 진압 후 유배, 형 주공 단이 채숙 도 아들을 채나라에 분봉함.
6 조숙(曹叔) 진탁(振鐸) : 조(曹)
7 성숙(成叔) 무(武) : 성(成)
8 곽숙(霍叔) 처(處) : 곽(霍) 삼감의 난 가담 (망한 상나라 태자 무경 감시자, 주공 단 불만 무경과 함께 반란)
9 강숙(康叔) 봉(封) : 강(康) 위(卫=衞), (

주공 단 삼감의 난 평정후, 위국에 봉함)

10 담계(聃季) 재(載) : 심(沈)

 

후 처 아들

모숙 정(叔 鄭)

곡숙(叔)

옹백(伯)

착숙 수(叔 繡)

필공 고(公 高) 필씨에서 위(魏)씨로 바뀜

원백(伯)

풍후(侯)

십팔남: 순백(伯)

 

이해에 필요한 용어 설명

자(字)는 한자 문화권, 특히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성년이 되는 관례 때 받는 이름인 관명과 함께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짓는 새로운 이름을 말한다. 이는 이름이 부모가 주신 것으로서 부모님이나 스승, 왕(혹은 황제)외에는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하던 데에 기인한다. 따라서, 관례 전까지 어릴 때 쓰던 이름인 아명(兒名)이 따로 있다.
아명(兒名)맏이부터 순서대로 백(伯) · 중(仲) · 숙(叔) · 계(季) 순으로 자를 짓는 경우가 있었고, 5명이 넘는 형제일 경우 막내는 유(幼)로 끝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삼국지에서 사마팔달(司馬八達)로 유명했던 사마랑, 사마의형제의 경우, 첫째부터 막내까지 각각 백달(伯達) · 중달(仲達) · 숙달(叔達) · 계달(季達) · 현달(顯達) · 혜달(惠達) · 아달(雅達) · 유달(幼達)로 달(達)이 한국식 이름의 돌림자처럼 통일되어 있어서 자가 중달인 사마의가 둘째였음을 알 수 있다.

 

봉건제는 중국 주나라 때 시행된 것으로, 왕족과 공신들을 요충지에 제후로 봉하여 주나라 왕실을 지키는 번병(藩屛)으로 삼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주나라 왕족 및 공신으로 이루어진 50여 제후국들이 임명되어 중국 각지에 남아 있던 기존의 800여 제후들을 아우르도록 한 것이다. 주나라 이전부터 존재했던 800 제후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에도 봉건제도와 유사한 형태의 체제는 있었지만, 주나라 때 정치·사회 제도로서 로 정비되어 실시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봉(封)은 천자가 제후를 임명하고 토지를 하사하는 제도를 가리키는 한자어이다. 봉건제도는 토지를 하사(封)하여 나라를 세운다(建)는 의미이다. 이렇게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제후국을 삼는 것을 분봉(分封)이라 하며, 제후들에게 땅과 함께 작위를 내리는 것을 봉작(封爵)이라 하였다. 대부분의 제후는 주나라 왕족이 임명되었으며, 제후들은 다시 혈족을 중심으로 경대부(卿大夫)를 임명하고 채읍(采邑)을 나누어 줌으로써 계층적인 통치 체제가 나타났다.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혈연을 바탕으로한 종법(宗法) 질서를 통해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종묘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종법 질서를 확인하는 일이 크게 중시되었으며, 제후들에게는 제사에 참여하고 제사에 쓸 공물을 공급하는 책무가 부여되었다.
국가나 가문이나 왕실=종가 적장자 가문 대종 동일, 쓸데없는 절차 요즘은 피곤해 문화유산외엔 사라짐.

봉작(封爵)등급, 유교 경전이 주장하는 하나라는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5등작이 있었고, 은나라는 공, 후, 백의 3등작이 되었다가 주나라 때는 다시 5등작이 되었다고 한다.

민民은 사람人이 아닌 노예로, 주나라 정井전田제는 쉽게 말해서, 농토와 농사짓는 농민 노예로 구성, 9분의1 자동 징세되는 구조, 혈족과 공신을 분봉한다는 것은 평생 먹고 살 걱정없게 하는 것이다. 주 무왕은 역성혁명 성공 후 혈족과 공신들에게 분봉하고, 충성을 상납받는 형태로 15만에 불과한 주周족族으로 거대한 중국을 통치했다.

 

희姬성姓 위衛(卫)씨氏

위(衛, Wei)씨는 주무왕의 동생으로 전하는 강숙(康叔)이 위(衛)나라에 봉해지고 후손들이 성으로 하였다고 전한다. 인물로는 전국시대 위나라 출신의 진나라 전략가 위앙(衛鞅)이 있었다. 그는 위나라에서 태어나 진나라에서 관적하였다.
위만(衛滿)이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준왕(準王)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위만조선(衛滿朝鮮)의 국왕이 되었다.
다른 계통으로는 5호 16국 시대 북위 선비족이 위씨로 창성했다고 한다.
위(衛)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8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한양 단본이다.

 

희姬성姓 강康씨氏

주周 무왕武王~주 성왕 삼감의 난 발생전 9남 희姬 봉封은 강康국에 봉해져 강康숙叔(성왕의 강국 숙부)으로 불렸고, 삼감의 난 평정후 형인 섭정 주공 단은 반란 상나라 지역을 위卫(=衛)와 송宋, 둘로 나눴고, 송나라는 상商왕족 미자 계를 봉했고, 상商나라 수도 조가가 있는 위卫나라는 강康숙 희姬봉封을 봉했다.

삼감의 난 평정 위 송 위치
삼감의 난 평정 후 상나라 분할, 위 송 위치

 

성姓씨氏가 관작명, 분봉 지역 국國명名과 같은것에서, 지금 성씨로 치면, 희姬성에서 강康씨, 위衛씨가 된 것인데, 두번째 분봉국 위衛나라 1대 군주로 위衛씨 시조가 된 것이고, 첫째 아들 백모(아명)는 위나라 2대 군주로 희성 위씨를 이었고, 둘째 아들 중모(아명)는 기자 서여와 함께 평양(넓고 평평한 땅, 양평 요하 요동)에서 기자 조선 기(한)씨, 상나라 왕족인 기자 반란을 감시하는 주나라 희성 제후인 강후로 주변에 봉해졌으나, 기자가 건국 공신으로 임명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기자 후손들을 왕으로 모시는 신하로 변했고,  희성 강康씨 시조가 되면서 1,000년 이상 기箕(한韓)씨 흥망성쇄를 함께 했다.

 

중시조 14세손 강지연 공, 고려 태조 왕건 외 6대 조상 강호경은 한국 역사서에서 확인 가능한 관력이 분명하기 때문에, 일가 친척을 모두 기록하는 족보에, 68세손 강호경을 신천강씨 시조로 삼고 있는 것이고, 그 이전 조상은 전쟁으로 인한 사망과 피난으로, 상세한 기록이 아닌, 직계 조상 목록만 기록한 세보(세대, 이름, 관직 또는 사건만 기록)= 상계 기록을 보면, 기箕씨 조선에서 대대로 벼슬이 나타나고, 멸망한 후, 마한에서 벼슬, 마한이 망한 후 신라에서 관직이 쓰여져 있습니다.

 

기箕가 망하면서, 세운 마한이 청주 한韓씨가 이었는지, 이천 서徐씨가 이었는지 논쟁 불분명하고, 별개의 국가로 보기도 하기 때문에 연구가 필요한 부분인데, 신천강康씨 상계는 한韓씨 왕조에 명시된 왕들 명칭이 기록돼있고, 학계 주류는 이천 서徐씨로 보는 것 같습니다.


1763년 간행된 이천서씨 족보인 《계미보서(癸未譜序)》에는 서씨(徐氏) 성을 지닌 시조가 태어난 관향(貫鄕)을 크게 세 곳으로 꼽고 있다. 

“우리나라 서씨(徐氏)의 관향(貫鄕)에 두드러진 것이 세 곳이다. 이천(利川)은 아간공(阿干公)을, 부여(扶餘)는 온조왕(溫祚王)을, 달성(達成)은 소윤공(少尹公)을 선조로 삼았다. (중략)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기자의 40세손 준(準)이 난을 피해 이천 서하성(徐河城)에서 살았으므로 자손이 그 지명을 취해 성을 서씨(徐氏)라 했으니 이것이 노담(老聃)이 성을 얻은 것과 같고 가장 오래된 일이다

 

강康씨 상계를 보면 백제군을 방어하다 전사했고, 따라서 마한과 백제는 적대적 상극인 관계인데, 조선시대에 작성한 이천 서씨 계미보서 상극인 두가지 계통을 모두 쓰는 오류가 있습니다. 따라서 허위로 생각됩니다.

 

부여 서씨(扶餘 徐氏)는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아들이 난을 피해 남으로 와서 부여성(扶餘城)에 도읍을 정했다. 그의 30세 의자왕에 이르러 신라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의해 백제가 멸망했다. 그 뒤 태자 부여융은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에서는 부여융의 여(餘)란 글자를 고쳐 서(徐)라는 성을 주었으니 이것이 원백(袁伯)이 성을 전한 것과 같고 가장 근래의 일이다.

 

마한과 백제 적대적 관계를 고려하면 이 내용이 이천 서씨 유래에 맞습니다. 여(餘)는 상나라 계통  기자조선 서, 단군 후예인 부, 예+맥 고조선 연결 고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글자로 백제 부 융 까지 연결됩니다. 부여가 여를 돕는다는 뜻인 것에서 서로 다른 혈통 예족과 맥족 연대를 알 수 있습니다.
 

청주 한씨 족보에 의하면, 마한왕의 역대왕의 명칭과 치세기간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한 건국~멸망까지 9대)후조선 마지막 哀王(애왕)의 망명 후 馬韓(마한) 건국에서 멸망까지 9代 王位 世系"가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족보 속의 왕계보는 숭조사업의 일환으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아 실제 역사로 인정되지 않는다.

대수 시호 재위 기간 비고
1 무강왕(武康王), 애왕(哀王) 한준(韓準) B.C ?년~B.C 193년 기자조선의 말대 국왕월지국의 초대 국왕
2 강왕(康王) 한탁(韓卓) B.C 193년~B.C 189년  
3 안왕(安王) 한감(韓龕) B.C 189년~B.C 157년  
4 혜왕(惠王) 한식(韓寔) B.C 157년~B.C 144년  
5 명왕(明王) 한무(韓武) B.C 144년~B.C 113년  
6 효왕(孝王) 한형(韓亨) B.C 113년~B.C 73년  
7 양왕(襄王) 한섭(韓燮) B.C 73년~B.C 58년  
8 원왕(元王) 한훈(韓勳) B.C 58년~B.C 33년  
9 계왕(稽王) 한정(韓貞) B.C 33년~B.C 17년 마한의 마지막 왕. 온조왕에게 나라를 빼앗김.

 

강康씨 세보인 상계는, 38세손 자양이 위만 반란에 전사했고, 39세손 영숙이 마한에서 벼슬했고, 40세손 정휘는 지사 관직으로 BC 57년 신라 태동을 살폈고, 41세손 사조는 마한 효왕 때 대상 벼슬했고, 42세 승청은 사공으로서 상장군이 되어 백제군을 방어하다 전사했다고 나옵니다. BC17년 한씨 왕조는 계왕에서 망했고, 43세 아감 벼슬, 44세 상국 벼슬 45세 벼슬 없고, 46세 상장군 벼슬 47세 내주승상 벼슬 나오는데, 마한 한씨 왕실 망한 후에도 벼슬이 계속 나오는 관직명이, 백제 신라엔 없는 관직명으로, 강주가 있었던 지역에 가야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야 벼슬로 생각됩니다.  48세손 낙사 때 이벌찬 벼슬은 신라 성골 귀족 벼슬입니다. 마한 54개국 중 한씨 왕실이 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이고, 이후 신라에서 성골 귀족 벼슬들을 했습니다. 시조 강호경 별호 성골장군 표현은 신라 성골귀족을 뜻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김관의 편년통록에 고구려 출신으로 쓰면서, 이상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상계에 표시된 직계 조상 세보는 강기康騎, 아명이고, 강호경康虎景 성인이 돼서 쓰는 관명인데, 호경虎景은 호랑이와 관련된,

 

호경은 한동네 사람들과 평나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굴에서 자던 중 호랑이 한 마리가 굴에 나타났다. 굴 안의 일행은 어쩔 수 없이 갓을 벗어던져 제물이 될 사람 또는 호랑이와 싸울 사람을 결정하기로 했다. 이때 호경이 던진 갓을 호랑이가 물자 호경은 싸우려 나갔고, 때마침 동굴이 무너져 오히려 동굴 속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되었다.

범 호虎 경치 경景, 별명으로 생각되고, 신라 성골聖骨 귀족 출신 강기康, 별호 호경장군將軍, 또는 성골장군聖骨將軍으로 불렸습니다.

 

 

강康씨 상계에 둘째 아들 중모 이름이 강康후侯로 전해지고 있고, 위衛강康숙 희봉이 첫번째 분봉국 강康국國 군주 강康후侯로도 불려졌기에, 강康씨 시조가 위강康숙이냐? 혼선 있을 수 있는데, 기자 조선 왕으로 봉해진 것이 아닌, 상나라 왕족인 기자 서여 반란을 감시하는 주변 제후로 분봉된 것이고, 기자가 건국 공신으로 임명하면서, 기자의 신하란 위상으로, 위강숙 희봉 강康후侯의 아들임이 강조 됐을 수도 있습니다. 위衛강康숙 아들 이름이 모髦이고, 첫째를 백伯모髦 둘째를 중仲모髦 중국 아명 이름 부여 순서. 관작명은 위衛강康숙의 아들 강康후, 상商나라 왕족 기자 서여가 주나라에 망해 본향으로 돌아 온 것으로, 후侯는 주나라가 제후들에 부여하는 관작등급명입니다.  위강숙은 위衛씨 시조도, 강康씨 시조도 될 수 있지만, 위衛나라 1대 군주 시조가 됐으므로, 강康씨 시조는 둘째 아들 중모(관작명 강후康侯)입니다. 중국에 강康씨에서 파생된 성씨 후손이 3000만명이 넘는 것은, 상나라와 연결고리가 있는 부여계에서 파생된 소무구성 강국과 연결 고리가 있는 강康씨가 포함된 숫자 입니다.

 

상나라 왕족인 기자(箕子) 서여(胥餘), 단군 후예인 부여(扶餘,夫餘) 여餘를 부扶 돕는다는 뜻 있고, 부夫사내는 다른 뜻이지만, 두 글자 공통으로 포함된 문자라 생략됐을 수 있고, 음차만 썼다는 얘기도 있지만, 우연히 餘를 쓸 가능성은 한자 수를 고려하면 매우 낮습니다. 예+맥족은 서로 다른 혈통이 연대했다는 의미입니다.

 

고사는 동일한 사실에 다른 의미 해석있고, 그중 하나는, 주 무왕이 기자를 봉했다는 것과, 기자가 조선으로 돌아와 나라를 다스리자 조선후侯로 봉했다는 것이 있습니다. 기자가 조선을 세우고, 주 무왕이 조카를 조선후侯로 보냈다면 강康후侯가 되는데, 요하엔 이미 단군이 있었고, 상商 왕족인 기자 서여는 예+맥 단군과 같은 계통 연대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단군조선은 수도를 5번 이전했는데, 기자가 요하로 왔을 땐, 백두산 아래 북쪽으로 흐르는 강, 길림성 지역으로 수도 이전했고, 기자와 연대하면서 후조선을 형성, 송화강 유역까지 세를 확장했고, 후일 기자조선이 연나라 진개 침공에 요하를 잃고 평양으로 남하, 연나라 위만 반란에 망해서 남하 삼한을 세울 시기에, 단군조선은 부여를 시작했습니다. 요하 지역에서 주周족 중仲모髦는 강康후侯로서 힘 쓸 수 없었을 겁니다. 기자 서여도 굳이 이미 중국을 장악한 대세 주周 무왕과 무력으로 맞설 순 없고, 그에 따라 아버지 최초 분봉국인 강康성姓을 하사했다면, 그런 해석들을 할 수 있습니다. 상商나라 수도 태자 무경에게 3명의 감시자 동생들을 붙였던 것처럼, 상商 왕족인 기자 서여 세력을 방치 했을린 없는, 이 시기에 중국에서 요하로 유전과 유물적 큰 이동있었죠? 감시자로서 조카를 보내는 것이 순리, 동생 3명이 무경과 한패가 돼서 조카 성왕에 반란한 것처럼, 강康성姓을 하사하고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 대접하는 홍범구주를 말하는 노련한 기자 서여 신하로 익숙해졌다 생각됩니다.

 

위키 자료

강(康)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1,625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56위이다. 본관은 신천, 곡산, 재령, 충원, 제주, 진주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하나 현존하는 본관은 신천, 곡산, 재령 3본이 대종을 이룬다. 평안남도, 평안북도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신천 강씨(信川 康氏)의 비조 강후(康候)는 중국 주나라 무왕의 아우 강숙(康叔)의 둘째 아들로서 기원전 198년(BC1122년 상계 기록)에 고조선 평양에 들어와 왕실을 교화한 공으로 기자로부터 강씨 성을 받았다고 한다. 강후(康侯)의 67세손 성골장군(聖骨將軍) 강호경(康虎景)을 시조로 하고 있다. 중시조 강지연(康之淵)은 강호경의 14세손으로 고려 고종 때 호성공신에 오르고 신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신천 강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5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52,945명이다.
곡산 강씨(谷山 康氏)의 시조 강서(康庶)는 신천 강씨의 중시조인 강지연(康之淵)의 6세손으로 상산백(象山伯)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29,107명이다.
재령 강씨(載寧 康氏)의 시조 강득룡(康得龍)은 신천강씨의 중시조인 강지연(康之淵)의 8세손으로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는 그의 친누이동생이다. 강득룡은 고려 공민왕 때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결심, 관악산에 들어가 암자에 살면서 매일같이 산에 올라 개성을 향해 통곡하였는데, 이곳이 연주대(戀主臺)와 연주암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조는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하여 안정공(安靖公)이란 시호를 내렸고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재령으로 하였다. 2015년 3,401명이다.
영강 강씨(永康 康氏) 시조 강증(康拯)은 고려 예종 때 병마판관(兵馬判官)을 지냈는데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이 있어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씨 본관

강령(康翎) 곡산(谷山) 신천(信川) 임실(任實) 진주(晉州) 충주(忠州)

 

강령강씨(康翎康氏)
시조: 강극(증)[康極(拯)]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보면 그는 고려 예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경양(景襄)이라 시호(諡號)되었다고 하였다.
강령(康翎)은 황해도 장연군(長淵郡)에 있던 지명으로 영강현(永康縣)과 백령현(白翎縣)을 합한 이름이다. 주요 성씨로 강康씨가 있었다.
강극(康極)은 고려조에 병마판관(兵馬判官)을 지냈는데 여진정벌(女眞征伐)에 공이 있어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강령(康翎)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후손으로 강호경(康虎景)이 전해온다.
한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보면 시조는 고려조 예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경양공(景襄公) 강증(康拯)인데 일설에 그는 강인우(康仁祐)의 후손으로 전한다고 쓰여 있다.

 

곡산강씨(谷山康氏)
시조 : 강서(康庶).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보면 상산백(象山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本貫地>

상산(象山)은 곡산(谷山)의 별칭으로 고구려 때에는 십곡성(十谷城)이라 불렸고, 748년(신라 경덕왕 7) 십곡성현(十谷城縣)으로 편성되었다가 757년에 진서현(鎭瑞縣)이라 개칭하여 영풍군(永豊郡)이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곡주(谷州)로 개편되고 995년(성종 14)에는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1393년(태조 2)에는 곡산으로 개칭하고 부(府)로 승격하였으나, 태종 때는 곡주(谷州)에서 다시 곡산군으로 격하하였다. 1669년(현종 10) 부로 승격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곡산군(谷山郡)이 되어 개성부(開城府)에 속하였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황해도로 편입 되었다. 별칭으로는 덕돈홀(德頓忽)‧고곡(古谷)‧곡성(谷城)‧진서(鎭瑞)‧상산(象山) 등으로 불리고 있다.

 

주요 성씨로 康, 禹, 盧, 韓, 延씨 등이 있었다.
<氏族史의 개요>
아들 강윤성(康允成)은 조선 태조 때 국구(國舅)로서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985년 현재 전체인구 14,020명

 

신천강씨(信川康氏)

시조: 강후(康侯)

<氏族의 연원>

득성조 강후(康侯)는, 강성호소록(康聖湖所錄)에 따르면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무왕의 아우 강숙봉(康叔封)의 둘째 아들이 함께 평양(平壤)에 와 백성의 교화에 공을 세워 강자(康字)로 사성(賜姓)하고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에 봉함으로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위의 소록(所錄)은 제주현감(濟州縣監)을 지낸 강익보(康翊甫)가 가장(家藏)하여 왔던 보첩(譜牒)에 따른 것으로,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가 쓴 '평양지(平壤誌)'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己未譜'(1979)에는 시조를 강호경(康虎景)으로 하여 분파도(分派圖)를 만들고 그 13세손인 강지연(康之淵)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물론 앞서의 강후동래설(康侯東來說)을 전제로 한 계통도(系統圖)인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된 까닭은 그 사이 여러 병화(兵火)를 거쳐 승첩(乘牒) 등이 없어져 강후(康侯) 이후는 계대(系代)를 확연히 밝힐 수 없었던 사정 때문이다.
신천강씨 시조 68세손 강호경(康虎景)은 신라 때의 고관이었고 그가 충(忠)을 낳았으며, 보전(寶甸)과 보육(寶育)은 손자가 되며 이렇게 해서 고려 충렬왕 때 호종공신(扈從功臣)이었던 강지연(康之淵)에게까지 세계가 이어졌다. 

 

그리하여 강씨(康氏)는 전국에 사는 누구이든 모두 중시조인 강지연(康之淵)의 후손이라고 '己未譜'에 밝히고 있다. 

강지연(康之淵)은 고려 충렬왕조의 인물로 몽고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신으로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신성(信城)은 신천(信川)의 옛 이름으로 후손들이 그곳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후대에 와서 곡산(谷山)·재령(載寧)·충원(忠原)·진주(晋州) 등의 별관(別貫)이 생긴 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라고 한다.
곡산(谷山)의 경우, 신덕황후(神德皇后)가 곡산(谷山)에서 탄생하여 그 아버지를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象山은 谷山의 옛 이름)에 봉함으로써 조선시대에 신덕황후(神德皇后)의 적(籍)을 곡산(谷山)으로 한 까닭에 후손 중 곡산(谷山)으로 별관(別貫)하는 파가 생겼다.
재령(載寧)인 경우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아들 강득룡(康得龍)을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 安陵은 載寧의 옛 이름)으로 봉했는데 태종의 왕자란(王子亂) 때 그 자손이 선조의 봉읍(封邑)인 재령(載寧)으로 낙향하여 살면서 별관(別貫)으로 정한 까닭이라 한다.
충원(忠原)이나 진주(晋州) 등도 모두 자기 직계조상이 낙향하여 살았던 지방을 별관(別貫)으로 삼은 데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강씨(康氏)는 신천(信川)이 근원이므로 본관을 신천(信川)으로 통일하였으며 오래 전의 세보(世譜)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本貫地 연혁>
고구려 때 승산군(升山郡), 고려초에 신주(信州)로 고쳤다. 조선 태종13년에 신천(信川)으로 바꿔 불렀고, 예종1년에 군(郡)으로 승격시켰으며 1914년에 문화군(文化郡)과 합하였다.
한사군(漢四郡) 때는 낙랑군(樂浪郡) 혹은 대방군(帶方郡) 소명현(昭明縣)으로 불렀다.

<派名錄>
평강파(平康派), 해주파(海州派), 임천파(林川派), 무장파(茂長派), 갈마곡파(渴馬谷派), 강진파(康津派), 용장파(龍庄派), 송운파(松雲派), 장단파(長湍派), 양덕파(陽德派), 삭주파(朔州派), 안성파(安城派), 선산파(善山派), 금천파(金川派), 죽산파(竹山派), 구천파(龜川派), 양주파(楊州派), 평양파(平壤派), 충주파(忠州派), 은산파(殷山派), 안주파(安州派), 재령후평파(載寧後坪派), 송화파(松禾派), 상주파(尙州派), 재령파(載寧派), 연기파(燕岐派), 함흥파(咸興派), 임실파(任實派), 수안파(遂安派), 북청남포단양파(北靑藍浦丹陽派), 숙천파(肅川派), 정주파(定州派), 제천파(堤川派), 만경파(萬頃派), 보령파(保寧派), 제주파(濟州派), 영변-운산-개천파(寧邊-雲山-价川派), 오산파(五山派), 진위파(振威派), 희천파(凞川派), 임피파(臨陂派), 익옥파(益沃派), 발산파(鉢山派), 익산파(益山派), 전주파(全州派), 예산-달전-노성파(禮山-達田-魯城派), 창성파(昌城派), 서흥파(瑞興派)

<주요 世居地와 변천>
'송도지(松都誌)'에 장단부(長湍府) 오관산(五冠山)은 강충(康忠)이 살던 곳이라고 씌어 있다 한다. 강충(康忠)은 시조 강호경(康虎景)의 아들로, 신라 때부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천군지(信川郡誌)'에는 강씨(康氏)가 이 고장 토착인으로 신수(信水) 북쪽에서 세거했는데, 고려 때 몽고의 외란에 중시조인 강지연(康之淵)이 충렬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신성군(信城君)에 봉해졌는데, 신천(信川)에 세거해 온데서 봉호(封號)가 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고려말의 홍건적(紅巾賊)의 침략으로 강씨(康氏)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옛 번거(繁居)의 영광이 사라졌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강씨(康氏)는 장단(長湍)과 신천(信川) 등지에서 여러 대 세거하였는데, 11세손 강문(康文)이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낸 뒤 철원(鐵原)에 터를 잡음으로써 평강파(平康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그런데 평강(平康)에 시거(始居)하기는 13세손으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강필(康弼)에게서 비롯되었다.
해주파(海州派)는 10세손 강집(康諿)의 자손이 해주(海州)·임천(林川)·양천(陽川) 등지로 흩어지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임천파(林川派)는 번성하여 11세손 강효업(康孝業) 이하 21세손 대에 이르기까지 세거의 터를 굳게 지켜왔다.
임천파(林川派)의 파조(派祖) 강수문(康秀文)의 큰아들이 강설(康說)에게 입양자(入養子)함으로써 해주파(海州派)가 굳어졌다. 13세손 강후맹(康候孟)이 해주(海州)로 이거해 감으로써 세거지가 이루어졌는데 20세손 이후까지 크게 세를 누렸다.
강씨(康氏)가 전남 영광(靈光)으로 세거지를 넓혀간 것은 6세손 강류(康旒) 때다. 그는 단종조의 대관(大官)으로 있다가 세조의 등극을 마땅치 않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영광(靈光)에 둔거(遯居)의 터를 잡은 것이었다.
강진파(康津派)는 그의 9세손인 강응록(康應祿)이 이조정랑(吏曹正郞)에서 물러난 뒤, 강진(康津)에 터를 잡음으로써 자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안주파(安州派)는 9세손 강연(康延)이 성종 때 박천(博川)에 이거한 뒤 큰 아들 강순석(康順碩)이 안주대가촌(安州大街村)에 옮겨 터를 잡음으로써 세거지가 되었고, 임실파(任實派)의 강적(康積)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치임한 뒤 가산(嘉山) 땅에 들어가 살았다.
보령파(保寧派)의 강영(康永)은 강지연(康之淵)의 8세손이다. 고려 공민왕 때 전라감사(監司)를 지냈는데, 그 뒤 제주도에 들어가 제주파(濟州派)의 파조(派祖)가 되었고 그 큰아들 강귀존(康貴尊)은 호서(湖西)땅 보령(保寧)에 터를 잡았다.
영변파(寧邊派)는 강자인(康自仁)이 성종18년에 영변(寧邊)에 처음 터를 잡았고, 아우 강자의(康自義)는 운산(雲山)에 살게 되었다.
정주파(定州派)는 강맹문(康孟文)이 정주(定州)에 터를 잡았는데 그는 10세손이 된다. 임피파(臨陂派)는 8세손 강민(康敏)이 임피(臨陂)로 옮겨 감으로써 시작되었고, 강덕관(康德寬)은 해주(海州)에 살게 되었는데 9세손이 된다.
서흥(瑞興)에 강씨(康氏)가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5세손 강건(康健) 때부터이고, 평양파(平壤派)는 13세손 강필(康弼)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물러난 뒤 평양(平壤)에 정착함으로써 번거(繁居)의 터가 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 당시에는 충남 연기군(燕岐郡) 금남면(錦南面), 보령군(保寧郡) 오천면(鰲川面), 전북 고창군(高敞郡) 대산면(大山面), 김제군(金堤郡) 진봉면(進鳳面), 경북 선산군(善山郡) 고아면(高牙面), 상주군(尙州郡) 상주읍(尙州邑), 제주도 제주시(濟州市) 화북동(禾北洞)·삼릉동(三陵洞)·삼양동(三陽洞)·애월면(涯月面)·조천면(朝天面)·축재면(蓄在面), 서귀포시(西歸浦市) 남원면(南元面)·표선면(表善面)·성산면(城山面), 황해도 서흥군(瑞興郡) 구포면(九圃面), 송화군(松禾郡) 봉래면(蓬來面), 재령군(載寧郡) 청천면(淸川面)·삼강면(三江面)·하성면(下聖面)·장수면(長壽面), 금천군(金川郡) 서북면(西北面), 평북 운산군(雲山郡) 운산면(雲山面)·영변면(寧邊面)·소촌면(少村面)·백령면(百嶺面), 박천군(博川郡) 동남면(東南面)·남면(南面)·청룡면(靑龍面), 정주군(定州郡) 고안면(高安面)·덕언면(德彦面)·옥천면(玉泉面), 창성군(昌城郡) 창성면(昌城面), 평남 순천군(順川郡) 신창면(新倉面)·북면(北面), 용강군(龍崗郡) 지운면(池雲面)·금곡면(金谷面), 평원군(平原郡) 노지면(鷺池面), 강서군(江西郡) 강서면(江西面), 맹산군(孟山郡) 학천면(鶴泉面), 강서군(江西郡) 보림면(普林面), 안주군(安州郡) 신안주면(新安州面), 대동군(大同郡) 남곶면(南串面)·고평면(古平面)·용산면(龍山面)·자족면(紫足面), 함남 북청군(北靑郡) 신포면(新浦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음이 밝혀졌다.

주나라 상나라 관계는 은본기 주본기를 읽어 보면 보면 알 수 있고, 이 둘은 주나라 시작은 서북쪽 오르도스 지역, 상나라 시작은 동북쪽 요하문명, 본질적으로 다른 혈족입니다. 상나라가 다스리던 중국은 성씨 씨족, 대종 소종들 혈족들과 전쟁에서 잡아온 노예들로 족읍 국가들이 구성됐고, 주나라는 상나라 서쪽 지역에 있던 15만 명 규모 제후급 씨족였습니다. 주나라 문왕 희창은 상나라 서백 벼슬을 했고, 아들인 주무왕 때 반란을 일으켜 상나라를 멸망 시키고, 황제국 주나라를 건국 했습니다. 중국을 70개 지역으로 나눠서 희성 친족들을 왕으로 분봉했고, 20개 지역에 토착 호족과 공신들을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주 무왕 사후 성왕 때, 상나라 태자 무경과 삼감이 반란을 일으켰고, 성왕 삼촌인 섭정 주공 단은 상나라 지역에 동생 강숙을 왕으로 임명했는데, 최근 군권을 상징하는 도끼, 강후부가 출토됐고, 그것은 주 무왕 형제 10명중에서 9번째로 어린 강숙 희봉인데, 주 무왕 사망할 때 나이가 90살이 넘었던 강숙은 60~70대로 추정되는 나이, 관할 지역이 위나라 반경을 넘어 북방계통 상나라 대부분 지역임을 알 수 있고, 삼감의 난 진압 이후, 주나라는, 상나라 사람들을 노예로 중국각지에 분산하는 상민정책 실행했습니다. 상나라 왕족인 기자 서여가 있던  기箕는 상나라 북쪽 백적족 지역에 있었고, 이동한 평양은 현재 랴오닝성 요하 지역으로, 백적족 지역이나 요하는 위강숙 관할로 볼 수 있습니다. 춘추 전국시대 시간이 흐르면서 북방계통 땅인 요하는 중국 한족 통제 밖에 별개 지역으로 굳어졌지만, 주나라 초기엔 연나라와 교류했던 것으로 보이고, 위강숙 북방 관할 반경과 箕족 첫 위치와 요하 이동 국가 형성은 하루에 이뤄진 것이 아닌, 수십년에 걸쳐서 이뤄졌습니다. 삼감의 난과 상민정책으로, 상나라 유민 대규모 이동 늘어나면서 국가를 형성하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초기 箕씨와 康씨는 군신 상하 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로 생각됩니다. 기자가 건국공신으로 봉한 기자의 신하인 것과 동시에, 상나라 왕족을 감시하는 주나라 친족 康씨, 2가지 성격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氏族史의 개요>
강씨(康氏)의 득성조(得姓祖)는 기자(箕子)가 조선에 올 때 따라온 周나라 무왕의 아우 강숙(康叔)이라 한다.
그러나 그 뒤의 소목(昭穆)은 문헌 등의 인멸로 밝혀져 있지 않았고, 다만 신라 때 성골(聖骨)이란 자호(自號)를 지닌 강호경(康虎景) 장군의 아들이 강충(康忠)이고 이어 세계(世系)의 맥을 이었다.
중조(中祖)인 고려 때 인물 강지연(康之淵)의 선계(先系)는 이런 연유로 강호경(康虎景)까지의 상계(上系)는 13세가 된다. 이들 상계(上系) 인물들은 모두가 신라조와 고려조에서 현관(顯官)을 지냈다. 강충(康忠)이 상사찬아간(上沙餐阿干)을 했고 강보전(康寶甸)은 문하태학사(門下太學士), 강순산(康淳山)은 좌정승(左政丞), 그 아들 강만루(康萬嶁)는 대장군(大將軍), 강연창(康衍昌)은 우정승(右政丞), 7세손 강태주(康泰周)는 형부상서(刑部尙書), 강억(康億)은 이부상서(吏部尙書), 그리고 강지연(康之淵)의 아버지는 문하좌참찬(門下左參贊)을 역임했다.
그런 명문의 출신답게 강지연(康之淵)도 충렬왕을 호종(扈從)한 공신(功臣)으로 신성군(信城君)에 봉해졌고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다. 그 무렵 신천강(信川江) 이북에 강씨(康氏)가 대성을 이루며 세거했다고 한다.
그 아들 강부전(康富傳)은 집현전전한(集賢殿典翰)이었고 아들 또한 신원부원군(信原府院君)에 봉해질만큼 관직이 높았다. 이런 관력(官歷)은 대를 이어오면서 끊임이 없었다.
관열(官閱)의 화려함은 강씨(康氏)의 계통이었지만 특히 6세손 강류(康旒)의 경우는 특기할만 할 것이다. 그는 전과중시(殿科重試)에 합격, 단종의 특명으로 제포첨사(薺浦僉使)를 지냈으나 단종손위(端宗遜位)에 따른 불만으로 벼슬을 버리고 영광(靈光)으로 남하(南下), 은거해버린 인물이다.
신천강씨(信川康氏)가 7세손인 강윤성(康允成)의 딸이 이태조의 계비(繼妃)로서 신덕왕후가 된 벌열(閥閱)의 배경을 지녔으면서도 자기대로의 명분을 지킨 인격이 고매하다고 하겠다.
그런가 하면 같은 6세손인 강곤(康袞)은 단종조에 병사(兵使)로서 3등공신이 되었는데, 세조조 정란공신(靖亂功臣)으로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신천군(信川君)에 봉해졌다. 이어서 예종조에 3등공신이 되었고 성종조에는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어 충무(忠武)라 시호된 분이다.
금천파(金川派)의 인물로 7세손인 강치성(康致誠)은 세조조에 문과에 급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한림(翰林)으로 있을 때 민수(閔粹)의 사초(史草)사건으로 화를 입은 분이다.
화려한 환력(宦歷)을 지닌 이들은 강씨(康氏)에게 많다. 이를테면 6세손인 강서(康庶)는 고려 충숙왕 때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뒤, 조선조에 들어와 순성보리삼중대광(純誠輔理三重大匡)이었고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에 봉해진 인물로 그의 아버지 강숙재(康淑才) 역시 벽상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을 지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강씨(康氏)의 흥륭(興隆)을 돋운 이로는 아무래도 강윤성(康允成)을 꼽아야 될 듯 싶다. 그는 강지연(康之淵)의 7세손이며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아버지가 된다.
신덕왕후는 이태조의 계비(繼妃)로 뒤에 고황후(高皇后)로 추존되었다. 왕비의 오빠인 강득룡(康得龍)은 추성좌리공신(推誠佐理功臣)으로 삼중대광첨의정승(三重大匡僉議政丞)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이 되었고 안정(安靖)이라 시호되었다.
그의 아우 순룡(舜龍)은 고려 공민왕 때 찬성사지밀직사사(贊成事知密直司事)로 은성부원군(銀城府院君)이었다가 조선 건국에 따라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재령백(載寧伯)에, 신천군(信川君)에 봉해진 분이다.
6세손 강도(康度)는 봉익대부(奉翊大夫) 순성보절(純誠輔節) 사공상주국(司空上柱國)으로 충원백(忠原伯)이었고, 아우 강제(康濟)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이었고, 15세손인 강성문(康聖文)은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벌족(閥族)인 경우, 대개가 그렇듯이 강씨(康氏)도 문한(文翰), 효행(孝行) 등에 걸출한 인물이 없지 않았다.
강원기(康元紀)는 신덕왕후와 4촌 사이로 강윤의(康允誼)의 아들이다. 길재(吉再), 권근(權近), 정몽주(鄭夢周) 등 석학(碩學)들과 어울려 경학(經學)과 문한(文翰)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이태조 등극을 못마땅히 여겨 끝내 두릉(杜陵)에 은거(隱居)해 버리고 말았다. 문헌(文獻)이라 시호됐다.
강영(康永)은 8세손으로 문과에 합격,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냈으며 문장(文章)·기절(氣節)·강개(剛介)의 인물로 알려졌던 인물이다. 그 아들은 유훈(遺訓)을 받들어 불사(不仕)하고 제가창업(齊家創業)에 평생을 보냈다.
후세에 내려와, 15세손 강후진(康候晋)도 박식(博識)과 경사(經史)에 밝아 저술도 여러 권 남겼다. 강석운(康錫運)도 그와 비슷한 인물이었다.
특히 효행으로써 종문(宗門)을 빛낸 인물의 보기를 들자면, 강지수(康智水), 그는 무장파(茂長派)의 강귀생(康貴生)의 아들로 13세손이다. 효성이 지극하다고 알려졌던 강경도(康經道)는 18세손으로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여 평생을 형제가 같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
강귀중(康貴中)은 12세손으로 천성이 효심에 차 어머니의 병환에 할지진혈(割指進血)로써 병을 낫게 하고, 아버지의 상(喪)에는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고, 청빈한 살림 속에서도 홀어머니의 봉양에 지극했다고 한다.
신천강씨(信川康氏)는 고려조에서 벌족(閥族)의 세(世)를 이어오다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배출됨으로써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을 비롯한 현관(顯官)과 봉작(封爵)이 여러분 나왔다. 그러나 태종 때의 왕자란(王子亂)으로 신덕왕후 소생인 두 대군(大君)이 화를 입게 됨으로써 강씨일문(康氏一門)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영재는 끊임없어 적어도 조선시대 중기까지 이어왔다.

 

신천강康씨 대종회 57개 분파 정리, 매년 10월 3일 강호경 14세손인 중시조 강지연 세향제를 지낸다.

곡산(谷山)시조:강서(康庶), 아들 1강윤귀 2강윤성 3강윤의 4강윤휘 5강윤부

강윤성 5자녀중 장남 강득룡은 재령(載寧)파 시조로, 다른 가족과 달리 고려조에 충절 지켰고, 중시조 세향제 후 재령 후손들은 강득룡 제를 따로 지낸다.

 

임실강씨(任實康氏)
시조: 강리(康理)
임실(任實)은 전북 동남에 위치하며 본래 백제의 임실군(任實郡)이다. 주요 성씨로 康氏가 있었다.
강리(康理)는 조선조 태종8년 문과에 급제하여 박천군수(博川郡守)를 지냈다고 한다.
한편 문헌이 없어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

 

진주강씨(晉州康氏)
시조: 강여읍(康汝揖). '증보문헌기보(增補文獻備考)'에 보면 조선조에 郡守를 지냈다고 하였다.
진주(晉州)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이다. 주요 성씨로 康, 姜, 金, 柳, 朴, 蘇, 河씨 등이 있었다.
전해오는 문헌이 없어 정확한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
다만 후손들이 조선조에 군수(郡守)를 지낸 강여읍(康汝揖)을 시조로, 진주(晉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한편 후손으로 강홍제(康弘濟)가 전해오는데 그는 영조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풍기군수(豊基郡守)를 역임했다고 한다.

 


충주강씨(忠州康氏)
시조: 강도(康度).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시조를 '강이(康儞)'라 하였다. 선조때 문과에 올랐으며 아버지는 강세운(康世雲)이라 하였다.
<本貫地>
충주(忠州)는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 일명 未乙省, 亂長城)이다. 주요 성씨로 康, 金, 梁, 龍, 石, 魚, 崔씨 등이 있었다.
강도(康度)는 강씨(康氏) 득관조(得貫祖) 강지연(康之淵)의 5세손으로 충원백(忠原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한편 강세운(康世雲)의 아들로 조선조 선조18년 문과에 급제한 '강이(康儞)'를 시조로 삼기도 한다.
1985년 현재 전체인구 15명

 

 

강康성姓에서 파생된 중국 13씨氏,

 

康  卫  凌  冰  宁  鹿  石  孙  戚  及  常  寇  商강  위  릉  빙  저  록  석  손  척  급  상  구  상

 

소무구성(昭武九姓)

석(石)는 중국(中國) 무위(武威 : 감숙성 감량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다. (石)씨는 주나라의 제후국 위나라, 정나라 계출된 희성 흉노족 성씨가 있다. 전국시대 천문학자 석신(石申)이 있다. 5호 16국  후조(後趙)을 세운 석륵 흉노 갈족으로, 갈이 돌을 뜻하므로 석(石)씨가 되었다.

 

康國: 사마르칸드를 가리키며 康은 Samar]qand의 音譯이다.

康國은 일명 살말건(薩末鞬)이라고 하며 또는 삽말건(颯秣建)이라고도 부르는데, 북위[元魏]에서 소위 실만근(悉萬斤)이라 부르던 것이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사(史)는 150리 떨어져 있고, 서북으로 서조(西曹)와는 100여 리 떨어져 있으며, 동남으로 100리 가면 미(米)와 접하고, 북으로 중조(中曹)와는 50리 떨어져 있다. 나밀수(那密水)의 남쪽에 있으며, 대성(大城)이 30개, 소보(小堡)가 300개 있다. 군주의 성은 온(溫)인데 본디 월지인(마한58개국에 월지국있었다)이다. 처음에 기련(祁連) 북쪽의 소무성(昭武城)에 거주하였는데, 돌궐에 공파되어 조금씩 남쪽으로 내려와 총령에 의지하다가 그 지방을 영유하게 되었다. 지파에 속한 사람을 왕으로 나누어 보내니 안(安)조(曹)석(石)미(米)하(何)화심(火尋)무지(戊地)사(史) 등을 칭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구성(九姓)’이 그것인데 모두 소무(昭武)를 그 씨(氏)로 삼는다.

 

강康는 스키타이 계통 사마르칸트 강국康國이 존재했기 때문에, 강국 군주의 성이 온(溫)이지만, 강康으로 소무9성을 보는 견해도 있기 때문에, 직계 조상 계보가 불분명하면 유전자 검사가 필요하다.

갈족(羯族)은 중국에서 활동했던 유목민족이다. 흉노족의 일파이다. 갈족은 본래 흉노족의 지배를 받던 피지배 민족의 하나였다. 한족들은 흉노, 말갈, , 선비족을 모두 오랑캐라고 치부하고 그것에 대한 구분을 하지 못한 부분도 측면도 있지만, 그들이 오랫동안 혼합되어 후대에 갈수록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서기 1~3세기 경 흉노의 5개의 씨족이 다투다가 분해되고, 그들의 지배를 받았던 갈족과 동호가 대륙에 남하하여 삼국시대 위나라에 귀속되었다. 5호 16국이 개막하면서 유연의 휘하에 있던 갈족 가운데 석륵(石勒)이 독립하여 후조(後趙)를 세운 후 유연의 조카 유요를 죽이고 전조(前趙)를 멸망시켰다.

 

갈사부여(曷思夫餘, 22년~68년)는 부여 대소왕의 막내동생인 갈사왕이 갈사수 가에 세운 나라이다. 갈사(曷思) 또는 갈사국(曷思國)이라고도 한다.

 

스키타이계통 중국 강국康國 군주 성이 온(溫)씨, 부여 계통 고구려 졸본부여 출신 온조(溫祚) 고구려 온달(溫達), 한국에도 온(溫)씨가 존재하는 같은 계통으로 생각되는, 만약 중국에 존재하는 사마르칸트 연관 성씨에 강씨가 존재한다면, 주 문왕 희성 계통과 전혀 다른 혈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강康씨는 고대 역사를 고려하면 모두 위강숙 후손이지만, 장남이 衛씨 종가를 계승했으므로, 강康씨를 계승한 것은 둘째 중모=강후의 후손들이다. 한국과 중국 강康씨는 둘째 중모=강후를 시조로 함께 제를 지내는것이 맞다 생각되고, 기자 조선 - 마한 - 신라 - 고려 문중 조상 이동 경로를 고려하면, 상계가 불분명한 문중 역사가 짧은 신천강씨 시조 강호경 연결 고리가 없는 강康씨들과 공통분모 역시 둘째 동일합니다. 강후가 위강숙이던 둘째 아들 중모 여부는 할아버지 제사냐 아버지 제사냐처럼 다릅니다.

신천강씨 세향제는 중시조 강지연공 후손들이 지내는 것으로, 어차피 Y 유전자는 동일하겠지만, 계통도가 불분명하면, 삼촌 제사는 지내면서 아버지 제사는 안 지내는 후손 될수도 있습니다. ^^

 

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사기37-사마천

위(衛) 강숙(康叔)은 이름이 봉(封)이고, 주나라 무왕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이다. 그 밑으로 염계(冉季)가 있는데, 염계가 가장 어렸다.
무왕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물리치고 은나라의 유민과 그 땅을 주왕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에게 봉하여, 제후와 동등하게 해주고 주나라 선조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받들도록 했다. 무경이 그래도 따르지 않자, 그에게 난을 일으킬 마음이 있지 않을까 두려워 무왕은 동생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에게 무경녹보를 보좌하게 하여 그 인민을 화합시켰다.
무왕이 세상을 뜨고 성왕(成王)은 어렸기에 주공(周公) 단(旦)이 성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맡아 다스렸다. 관숙과 채숙은 주공을 의심하여 무경녹보와 함께 난을 일으켜 성주(成周)를 공격하려고 했다. 주공 단이 성왕의 명을 받아 군대로 은나라를 정벌하여 무경녹보와 관숙을 죽이고 채숙은 추방했다. 그리고 은나라 유민들을 강숙에 봉해주어 그를 위의 국군으로 삼고, 황하(黃河)와 기수(淇水) 사이 옛 상의 터에서 관할하게 했다.
주공 단은 강숙이 나이가 어린 것이 마음에 걸려 강숙에게 “은나라의 현인과 군자 그리고 장자들을 찾아 그 선조인 은나라가 흥하고 망한 까닭을 반드시 묻고 인민을 사랑하는 데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라고 당부했다. 은나라 주왕이 망한 것은 지나친 음주로 정치를 그르치고 여자 말만 들었기 때문이며, 주왕의 난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주공은 「자재(梓材)」를 지어 군자가 따라야 할 법을 보여주었다. 주공은 이에 따라 「강고(康誥)」, 「주고(酒誥)」, 「자재」라는 이름의 글을 지어 가르쳤다. 강숙이 나라로 가서 이 가르침을 실천하여 인민을 화합시키고 안정시키니 인민이 크게 기뻐했다.
성왕이 장성하여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자, 강숙을 주나라의 사구(司寇)로 임명하고 위에는 보물과 제기를 내려 그 덕을 널리 드러냈다.
강숙이 죽고, 아들 강백(康伯)이 위衛를 이었다.

 

강백(康伯)은 강성(康姓) 적장자(嫡長子)란 뜻이지, 공후백(伯)자남 작위 백작이 아니며, 주공 단은 강숙을 위후로 봉했고, 강숙의 적장자는 그 뒤를 계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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