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姜姓 최씨崔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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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성씨

강성姜姓 최씨崔氏


중국의 최씨(崔氏)는 강성(姜姓)에서 파생된 성씨(姓氏)


청하 최씨(淸河 崔氏)는 주나라 건국공신 강태공의 자손 중 하나가 산동성 청하 최읍(崔邑)에 살면서 그 땅 이름에서 씨를 따다 씀으로써 시작되었으며, 이후 본관을 청하로 하였다. 중국의 강씨(姜氏)에서 고씨, 노씨, 여씨, 구씨, 허씨 등 통합 247여개의 수많은 성씨가 파생되었으며, 최씨는 그 가운데 강태공의 직계 이다. 인물로는 후한 때 최염(崔琰), 위진남북조 시대에 최승호(崔僧護) · 최조사(崔祖思) · 최문중(崔文仲), 최호(崔浩)가 있었다.

북위 때 최호(崔浩)는 유명한 인물로 수학과 과학에 능하여 북위에서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선비족의 견제 속에 숙청되기도 하였다.

당나라 중종 때 최현위는 측천무후를 폐위하고 당 중종을 복운한 공으로 하북성의 제후로 봉분되었다. 그의 어린 동생 최승은 요녕병마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최승, 또는 최우 신라에 도적떼와 외적이 난립할 자, 당나라 병마사로 내임하여 외적을 소탕하고 신라에서 은청광록대부에 올랐다. 이후 경주에 살았고, 그 자손들은 충주로 이거하여 살았다. 한국 기록에는 최우의 초명이 최승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한국의 최씨(崔氏)


충주 최씨(忠州崔氏)의 시조는 중국 당나라(唐) 무종(武宗, 재위 840~846) 때 병마사를 지낸 청하 최씨 최승(崔陞)이다. 그의 초명은 최우(崔偶)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 기록에 따르면, 최승은 최현위(崔玄暐: 638~706)의 어린 동생으로 당나라 병마사를 지냈는데, 당나라 무종 재위 시대의 최승에 관한 기록과는 1세기에서 반세기 정도 시간 차이가 있다. 따라서 최우(崔偶)는 최승과 동일 연대의 사람이 아니다. 최우는 최승의 후손이거나, 연원에 두 이름이 등장하므로 같은 인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후대에 중국의 청하 최씨는 랴오닝 지역에서 병마사를 지냈다고 한다.

최승(崔陞)은 846년(신라 문성왕 8년)에 신라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창궐할 때 당 무종의 명을 받고 병마사(兵馬使)로 내임하여, 신라에 들어와서 이를 토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기록에는 최현위(崔玄暐: 638~706)의 동생으로 7세기에 태어난 인물로 되어 있어, 한국 기록 846년과는 1세기의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실제 사실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최우(崔偶)는 889년(진성여왕 3년)에는 원종(元宗), 애노(哀奴)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 소종의 명을 받아 상장군으로 내임하여, 반란을 평정하여 공으로 은청광록대부에 올랐다고 하나 원종과 애노의 반란은 신라 중앙군이 동원되었으며, 당의 지원군은 없었다. 그 후 당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신라 조정에 관적하여 경주에 살게 되었다고 하며, 후손들은 예성(蘂城, 충주)에 정착하였다.

후손들은 889년에 신라에 동래하여 은청광록대부가 되었던 최우(崔偶)을 시조로 하고, 고려 충선왕 때 판도판서, 예문관대제학을 지내고 중원백(中原伯)에 봉해진 최공의(崔公義)를 1세로 하고 있다.

최우청(崔遇淸)은 고려조에 수사공좌복야를 지냈다.


전주 최씨는 고려, 조선 시대에 청하 최씨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전주 최씨 가운데 문열공파, 문성공파등은 중국 청하에서 왔다고도 하나, 근거는 없다.


강상(姜尙)은 기원전 1211년(은나라 경정(庚丁) 8년)에 출생하여 기원전 1072년(주강왕 6년)에 사망할 때까지 나이가 139세에 달했다. 또다른 중국 기록에서 강상은 기원전 1140년 9월 12일(음력 8월 3일(~5) ~ ?)에 태어났다고 한다.

기원전 11세기 중국의 은나라를 멸망시킨 인물로 염제신농의 후손이라고 전해오며, 동해가 고향이다. 동해는 동해상으로도 불린다. 성은 강(姜),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 자는 자아(子牙)이며, 호는 비웅(飛熊)이다. 주왕이 항시 꿈에서라도 바라던 인물이 비로소 나타났다 하여 흔히들 태공망이라고도 불렸다

강태공의 본관은 천수 강씨(天水姜氏)이며,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이며, 전국칠웅인 제(齊)나라의 공작이 되었다.

강태공의 자손들(강급, 강소백 등)이 대대로 제나라를 이끌어왔으며, 이 시기에 중국의 고(高), 노(盧), 여(呂), 허(許), 구(丘,邱), 강(強), 방(方), 정(丁), 장(章), 사(謝), 제(齊), 하(賀), 향(向), 가(柯), 뢰(賴), 초(焦), 기(紀), 최(崔), 좌(左), 역(易)씨 등 수많은 성씨가 강태공의 자손으로부터 갈라져나갔다. 강태공 사당에는 해마다 강태공의 후손과 강씨에서 분파된 성씨가 대거 참례를 온다.

현재 강태공의 후손은 분성 성씨 외에 한국의 진주 강씨와 중국의 천수 강씨가 있다.


강상은 염제(炎帝) 신농(神農)의 51세손이요, 백이(伯夷)의 36세손이기도 하다. 주나라 문왕, 무왕, 성왕(成王), 강왕(康王)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춘추전국 시기의 제(齊)나라의 창시자요, 딸은 주 무왕의 왕후이다.

때는 기원전 1046년 2월 겨울, 상나라 주왕의 흉폭한 정치가 계속되어 천하가 비탄에 젖어 있을 시 홀연히 나타나 주 문무왕의 스승이 되어 4만 5천의 군사로 72만의 상군을 대파하는 기적적인 전쟁을 일구어낸 동이지사(東夷之士)이며 기인(奇人)이다. 이 전쟁을 목야전쟁(牧野戰爭)이라 하며, 목야전쟁이 주는 의의는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섬멸한 기적의 전쟁이요,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정의(正義)는 반드시 필승(必勝)한다는 정법을 확립시킨 정의필승의 전쟁이며, 대륙을 통일한 천하통일전쟁이라 할 것이다. 이후 제나라를 일으켜 제1대 초대 군주로 제나라는 32대 근 800여 년을 존속하였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천하의 스승국의 위치로 군림하여 제나라의 공작(제 태공)이 되었다. 제나라의 2대 군주의 지위를 큰아들 강급(姜及)에게 물려주었고, 강급은 제 정공(齊 丁公)이라고 불렸다. 강태공을 이어 제나라가 가장 흥한 시기는 제 환공 강소백(姜小白) 시기로 강소백은 춘추시대 첫번째 패자가 되기도 하여 강태공의 얼을 이었다. 제나라 최전성기에는 사방 5000리를 이룩한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강태공은 기원전 1072년에 신선계에 들었으며, 그때 연세는 139세였다. 의관을 서주(西周) 호경)(鎬京)에다 안장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강태공의 덕을 생각하여 제나라에다 강태공 의관총(衣冠塚)을 세웠다. 강태공은 주역(周易)의 확립자이며, 강태공이 저술한 육도삼략(六韜三略)이 현재에도 전해져 오고 있다. 육도삼략은 중국 고대 병서의 최고봉인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둘을 차지한다. 후대인 손무의 손자병법도 강태공의 육도삼략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후일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 황실에서조차 강태공을 무성왕(武成王)으로 칭하여 천하통일을 이룬 군주로 인정하였다.


신농(神農)은 중국 삼황의 하나이다. 흔히 '염제(炎帝) 신농(神農)씨'로 불리며, 열산씨(烈山氏), 염제주양씨(炎帝朱襄氏)라고 불리기도 한다.

《맹자(孟子)》에서 처음 나오며 농업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역경(易經)》에는 농업의 신, 의사 및 악사의 신으로도 되어 있다. 한의학의 최초의 저서로 유명한 '신농본초경'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신우두(人身牛頭)의 형상으로 전해진다. 섬서성의 강수(姜水) 부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姓)은 강(姜)씨라고 한다. 마차와 쟁기를 만들고, 소와 말을 길들이고 사람들에게 불로써 토지를 깨끗하게 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시대 이후로 농신(農神)으로서의 신농씨(神農)강(姜)씨 후직씨(后稷氏)희(姬)에 대한 제사를 지냈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선농단을 세워 매년 임금이 직접 밭을 간 후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베트남, 대만 등에서 지금도 신농의 은덕을 기리며 제향하고 있다.


(崔)씨는 한국의 성씨이다. 최(崔)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333,927명으로 조사되어, 한국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성씨이다.

최(崔)씨의 본관은 문헌에 387본까지 기록되어 있지만, 이 중 시조와 계대가 확인되는 본관은 경주(慶州)·전주(全州)·해주(海州)·강릉(江陵)·탐진(耽津:강진)·수성(隋城)·삭녕(朔寧)·화순(和順)·강화(江華)·낭주(朗州)·동주(東州:철원)·우봉(牛峰)·흥해(興海)·수원(水原)·통천(通川)·영흥(永興)·상원(祥原)·완산(完山) 등 43본이다.


최(崔)씨의 기원은 신라 계통과 고구려 계통 등 다양한 계통이 존재한다.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는 최(崔)씨는 1세기 평양 대동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최씨 낙랑’이 거론된다. 고구려 기록에 낙랑 최리(崔理)가 옥저에서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好童)을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신라 계통의 최씨의 기원은 신라 6부족의 하나인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의 촌장이었던 소벌도리(蘇伐都利)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계통으로 고구려 계통의 최(崔)씨가 있다. 최치원의 금석문으로 알려진 쌍계사 진감선사비에 ‘진감선사’의 속명이 최씨임을 밝히며, 고향은 금마(金馬, 현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로 적고 있다. 진감선사의 선조에 대해선 수나라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포로가 되어 고구려에 눌러 살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뒤 금마로 내려와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경주 최씨(慶州 崔氏) 시조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돌산고허촌의 촌장인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4세손으로, 신라 후기의 6두품 출신 학자다. 최씨 중 인구가 가장 많은 본관이지만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2명을 배출하였을 뿐, 가문이 퇴조하여 상신이나 대제학은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였다. 2015년 인구는 945,005명이다.
Y유전자 검사자 결과 O2a2b1a2a1a3b2b1 - F4249

  • 철원 최씨(鐵原 崔氏) 시조 최준옹(崔俊邕)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 太師)가 되었다. 최준옹의 현손 최석(崔奭, 1026년 ~ 1121년)이 1051년(문종 5)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예부사(守太保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禮部事)에 이르렀으며, 최석(崔奭)의 아들 최유청(崔惟淸)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3] 동주 최씨(東州崔氏)라고도 한다. 2015년 인구는 15,050명이다.
  • 해주 최씨(海州 崔氏)는 문헌공도의 창시자인 최충(崔沖, 984년 ~ 1068년)의 아버지 최온(崔溫)을 시조로 한다. 그의 선조가 해주에서 여러 대에 걸쳐 목민관(牧民官)을 지낸 후 해주의 수양산(首陽山) 아래서 세거(世居)했으므로 해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6세손 최윤의(崔允儀)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을 편찬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8명을 배출하였는데, 인물로는 세종 때의 집현전부제학 최만리(崔萬理),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순절한 최경회(崔慶會),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최규서(崔奎瑞) 등이 있다. 2015년 인구는 201,625명이다.
  • 낭주 최씨(朗州崔氏) 시조인 원보(元甫) 최상흔(崔相昕)은 전라남도 영암군(靈巖)에 대대로 살아온 토착인이다. 그의 아들이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할 것을 예지하여 최지몽(崔知夢)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고, 고려 개국 공신이 되었다. 2015년 인구는 17,205명이다.
  • 우봉 최씨(牛峰崔氏) 시조 최원호(崔元浩)는 고려 명종 때 영열우성공신(英烈佑聖功臣)으로 삼중대광문하시중상장군(三重大匡門下侍中上將軍)에 오르고, 그의 아들 최충헌(崔忠獻)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진강군개국후(晉康郡開國侯)에 봉해졌으며, 손자 최우(崔瑀)가 강화천도의 공으로 진향후(晉陽侯)에 봉해졌다.[6] 최충헌의 증손 최의가 숙청된 후 우봉 최(崔)씨 무신정권 세습 체제는 종결되었다. 2015년 인구는 120명이다.
  • 전주 최씨(全州 崔氏)는 시조가 다른 네 계통이 있다. 문열공파 최순작(崔純爵)은 고려 정종 때 문하시중으로 완주 개국백에 봉해졌다고 한다. 사도공파 최균(崔均)는 고려 조위총의 거병 때 순절하고 완산군에 추봉되었다. 문충공파 최군옥(崔群玉)은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내고 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458,191명이다.
Y유전자 검사자 결과 O1b2a1a2a1a-CTS7620, O1b2a1a1-47z

  • 강릉 최씨(江陵 崔氏)는 시조가 다른 세 계통이 있다. 경주계 시조 최필달(崔必達)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으로 좌정승이 되고 경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전주계 시조 최흔봉(崔欣奉)은 고려 태조의 부마이다. 그의 12세손 최입지가 고려 말에 문하평리 상호군을 지내면서 공을 세워 강릉군에 봉해졌다. 강화계 시조 최문한(崔文漢)은 고려 문과에 급제한 최전(崔佃)의 후손으로 충숙왕의 부마이다. 이성계가 왕위를 빼앗고 조선을 개국하자 강릉 산 속 깊숙히 은거하여 살았다. 2000년 인구는 145,335명이다.
  • 삭녕 최씨(朔寧 崔氏) 시조 최천로(崔天老)는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고 한다. 중시조 최유가(崔兪嘉)는 고려 명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최유가(崔兪嘉)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친어모군낭장(新禦侮軍郎將)을 지낸 최선보(崔善甫)와 함경전부사(含慶殿副使)를 지낸 최연(崔珚)을 각각 1세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는 두 계통을 전한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3명을 배출하였는데 영의정에 오른 인물로는 최항(崔恒)과 최흥원이 있다. 2015년 인구는 51,525명이다.
  • 탐진 최씨(耽津 崔氏)의 원조는 고려 때 상약원직장(尙藥院直長)을 역임한 최철(崔哲)이며, 시조는 고려 때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 최사전(崔思全)이다. 그러나 최사전의 아들 최변(崔弁)과 최열(崔烈) 이후의 기록이 전란에 실전되어 각 파 중시조들의 세거지를 따서 그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인 최사전은 의술로 조정에 진출하였으나 고려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을 인정받아 공신에 책록되었고,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수태위(守太尉),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최철의 선조는 탐진현(현 전라남도 강진군)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89,943명이다.
  • 화순 최씨(和順 崔氏)의 시조 최세기(崔世基)는 고려시대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그가 전라남도 화순군의 옛 이름인 오산(烏山)군에 봉해짐으로써 화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최세기와 같이 몽골군의 침입 때 공을 세우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최부(崔傅)를 함께 시조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상계가 실전되어 서북면도감판관(西北面都監判官)을 지낸 최언(崔堰)를 기세조(起世祖)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최윤의(崔允儀)를 기세조로 삼는 계통도 있다. 화순 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1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38,604명이다.
  • 강화 최씨(江華崔氏) 시조 최익후(崔益厚)는 고려 중엽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강화(江華)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0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13,372명이다.
  • 흥해 최씨(興海 崔氏) 시조 최호(崔湖)는 고려 공민왕 때 삼중대광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역임하였으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훈되고 곡강부원군(曲江府院君)에 봉해졌다. 2000년 인구는 14,792명이다.
  • 통천 최씨의 시조 최경현(崔景賢)은 고려 정종 때 정의대부판밀직사사(正義大夫判密直司事), 중서좌상시(中書左常侍), 감찰어사(監察御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통천 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하였다. 인물로는 조선 초기의 장군인 최운해, 세종 때 4군을 개척하고 세종묘에 배향된 최윤덕, 선조 때의 명문장가인 최립이 있다. 2000년 인구는 8,144명이다.
  • 수성 최씨(隋城 崔氏) 시조 최영규(崔永奎)는 원래 김(金)씨였다. 그는 1261년(고려 원종 2년)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전서겸 보문각 대경을 지냈다. 1302년(충렬왕 28년) 충렬왕이 그에게 최씨 성을 내리고 수성백에 봉했다. 시조의 묘는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에 있다. 수성 최씨는 고려 때 부정을 지낸 최거경을 1세조로 하는 또 다른 두 계통이 있다. 수성 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61,231명이다.
  • 수원 최씨(水原 崔氏)는 시조를 다른 두 계통이 있다. 하나는 고려시대 산원동정(散員同正)을 지낸 최정(崔靖)을 시조로 하며, 또 다른 계통은 고려 예종 때 수주(水州)의 호장(戶長) 최상저(崔尙翥)를 시조로 한다. 고려사 열전에 기록된 인물로 최사위(崔士威, 961년 ~ 1041년)가 있다. 2015년 인구는 14,687명이다. 수원(水原)의 옛 이름이 수성(隋城)이라 와 수성 최씨(隋城 崔氏)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수원 최씨(水原 崔氏)는 원최(原崔)라 하고 수성 최씨(隋城 崔氏)는 내최(來崔)라고 부른다.
Y유전자 계통 검사자 결과 O2a2b1a2a1a2*-F444+, F273+, F1866+, MF795+

  • 영흥 최씨(永興 崔氏) 시조 최지미(崔之美)의 손자 최한기의 원래 성은 조씨(趙氏)이며, 그의 딸이 이자춘에게 시집 간 후 성을 최(崔)씨로 바꾸고 이름도 한기(閑奇)로 고쳤다. 최한기의 딸은 이성계를 낳았고, 후에 동북면 출신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태조로 즉위하자 최한기가 영흥백(永興伯)에 봉해졌다. 묘소는 함경남도 영흥군 덕흥면 진동리에 있다. 이성계의 어머니는 의비(懿妃)로 봉하여졌고, 뒤에 태종이 의혜왕후로 추봉하였다. 2015년 인구는 328명이다.
  • 완산 최씨(完山 崔氏)의 시조 최순작(崔純爵)은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으며 검교신호위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으로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2015년 인구는 3,563명이다.
  • 당진최씨 (唐津崔氏) O2a2b1a2b2a-F728

최씨(崔氏) 한,중 주요 본관 지역청하 최씨와 경주 최씨는 시조 역사를 보면 상관 관계가 없고, 지리적으로도 멀다. 유전자 검사는 어떨까?



토종 경주최씨 한중일 혼혈이었다-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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