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는 한반도 절반 남한에 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 한반도에 갇혀있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전(前)단군조선(檀君朝鮮)과 후(後)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나눠서 봐야 하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은 후(後) 단군조선(檀君朝鮮)에 해당된다.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이 조선을 세우고 평양성에 도읍을 하였다가 백악산 아사달(白岳山阿斯達)로 옮겨 1천 5백년을 다스렸으며, 주나라 초기에 기자(箕子)를 피해 장당경으로 옮겼다고 했다. 허목의 《미수기언》(眉叟記言)에는 장당경을 당장경(唐臧京)이라고 표시하였으며, "유주(幽州)에 당장경(唐臧京)이 있었으니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그곳을 단군조선의 도읍지라고 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한자는 역순으로 쓰기도 하기 때문에, 평양平壤=양평壤平, 장당경=당장경 같은 말이고, 평양은 우리가 생각하는 현재 평양과 차이가 있습니다.
"요동성(遼東城) 또는 양평성(襄平城)은 만주에 있었던 옛 성으로, 지금의 랴오닝 성 랴오양 시의 근방에 위치해 있었다. ‘요동’은 ‘요하(遼河)의 동쪽’이란 뜻으로, 지금도 랴오둥반도(遼東半島)라는 이름에 남아 있다. 이 지역에는 고조선이 있었으나 기원전 3세기 연이 점령하면서 요동군이 설치되었다. 이 때 기록에 양평성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윤내현은 《고조선 연구》에서 아사달 및 고조선의 중심지 위치가 다섯 차례 이동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사달(阿斯達)이 조선(朝鮮)을 의미하는 고유어라는 견해도 있다. 이병도는 아사달의 뜻을 '아침의 땅', '아침의 산', '빛나는 아침의 땅' 등으로 해석하고, 아침 조(朝)자와 빛날 선(鮮)자를 합쳐서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아사달의 '아사'는 일본어에 '아사'가 아침이란 말인 것에 비추어 아침의 한국 고대어일 것이며, '달'은 양달(陽地)·응달(陰地)의 '달'(地)과 같이 땅을 뜻하는 것으로 아사달은 조양(朝陽) 또는 조광(朝光)의 땅이라는 뜻인데, 이것이 한자로 조선(朝鮮)으로 표기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차오양(조양, 중국어 간체자: 朝阳, 정체자: 朝陽, 병음: Cháoyáng)은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에 있는 도시이다.
차오양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5000~6000년 전의 홍산 문화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기원전 3세기 한나라초엽에 처음 '류성'(柳城)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4세기와 5세기 오호십육국시대에 전연, 후연, 북연 등이 이곳을 통치했다. 당나라 때 차오양은 동북아시아 문화,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써 번영하였다.
홍산문화 유적지는 조양시와 츠펑시에 주로 분포하고, 그곳은 요하 상류 지역이다. 평양(平壤)=요동성은 안산시 근처 랴오양 시(요양시, 중국어: 辽阳市, 遼陽市)에 있다.
백악산 아사달(白岳山阿斯達), 궁홀산(弓忽山), 금며달(今㫆達)이라고도 한다.
아사달은 조양시 근처일 가능성 있다.
기원전 4500년 ~ 기원전 3000년 신석기시대 훙산 문화 유적
기원전 3000년 ~ 기원전 2000년 동석병용시대(銅石倂用時代) 소하연 문화 유적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1500년 초기 청동기시대 하가점 하층 문화 유적
하가점(夏家店) 하층 문화는 밭농사 흔적 농경을 주로 하던 사람들이고, 나중에 생긴 상층 문화는 유목 민족 흔적이 많다. 하夏여름 가家집 점店가게 하(夏)나라 유적이라 말하는 것 같은데, 중국 하나라 시기 영향권은 만리장성이 있는 산맥 밖을 넘지 못했고, 만리장성도 주나라 때나 돼야 영향권입니다. BC300년 이전에 유적지가 있는 요하(遼河) 지역은 경계 밖입니다.
장당경의 현재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 허목은 유주(幽州, 허베이 성 북부 및 랴오닝 성 일대)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윤내현 교수는 중국의 다링허(대릉하, 大凌河) 인근이라 주장하였다.
다링허(대릉하, 중국어: 大凌河, 병음: dàlíng hé)는 중화인민공화국 동북부의 랴오닝 성 서부(요서)를 흐르는 큰 하천이다. 허베이 성 동부의 롼허(난하)와 랴오닝 성 중앙부의 요하(遼河) 사이에서 흐르고 있다. 옛날에는 백랑하(白狼河), 백랑수(白狼水)로 불렸지만 요대에 영하(靈河)로 개명되었고 금대에 능하(凌河)로 개명되었다. 원대 이후 서쪽으로 인접해 흐르는 샤오링허(小凌河)와 구별하기 위해서 대릉하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중국에 사대 하다 보니, 생각의 스케일이 매우 협소해진 것 같습니다.
대릉하는 조양시에 있는 강이고, 기자가 이동한 평양은 우측에 있는 요동성인데, 기자가 서쪽 주나라에서 도망 왔는데, 그 방향으로 옮겼다는 것은 비 상식적입니다. 나중에 연나라 진개 요동 침공으로 왕검성 요동 평양을 현재 평양으로 이동했고, 그 시기 전후해서 발생한 부여 위치를 고려하면,
장단경은 부여(扶餘,夫餘)가 있었던 길림성, 또는 쑹화강(송화강, 중국어: 松花江)이 있는 하얼빈까진 이동했을 겁니다. 부여(扶餘,夫餘) 전신으로 생각한다는 고리국(槀離國)위치를 고려하면 그렇습니다.
백악산 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서 백악산이 백두산일 가능성 있고, 고리국(槀離國)위치와 강 줄기를 보면, 쑹화강(송화강, 중국어: 松花江)발원지가 백두산입니다.
신단수(神檀樹) 태백산은 고조선(古朝鮮) 활동 반경이 만주 지역인 것을 참고하면, 현재 태백산(太白山)이 될 수 없는, 태행산맥 어딘가, 또는 산동성, 산시성, 대륙에 있는 높은 산이다.
고대 중국인 주류는 하(夏)나라와 주(周)나라에 뿌리가 있고, 하(夏)나라 영역은 황하(黃河) 중류 지역으로 지금보다 협소했고, 4 방향 이민족을 서쪽 서융(西戎), 남쪽 남만(南蠻), 북쪽 북적(北狄), 동쪽 동이(東夷)로 불렀다.
동이(東夷)가 있던 산동성 지역에 있는 산은 태산(泰山)이 유일하고, 박달나무 단(檀)이 주로 북경, 요하, 만주, 한반도 북부 일대에서 자생하는 것을 고려하면,태행산맥(太行山) 주변에 북적(北狄)이 분포한 것을 참고하면 그 지역 어딘가에 있는 산, 둘 중 하나다.
수(樹)는 목(木)나무, 주(尌)세울, 나무를 세우다, 자연림이 아닌, 박달나무 단(檀) 정원을 꾸밀 능력 있는 지역, 신(神)은 호족(豪族)을 뜻합니다.
이름에 박달이 들어간 여러 종류 나무 중 가침박달은 우리나라 중부 이북에 자라는 흔치 않은 나무다. 산림청에서 지정한 보존 우선순위 105번째의 식물이다. 산기슭과 계곡의 햇빛이 잘 드는 양지의 큰 나무 사이에 섞여 자라며 키 1∼5미터 정도의 작은 나무로 팔뚝 굵기면 제법 굵은 나무에 속한다. 잎은 손가락 2~3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에 끝이 뾰족하며 윗부분에 톱니가 있다. 특별한 모양새를 말하기 어려운 평범한 나무이나 꽃이 필 때면 우리들 눈에 금방 띈다. 대체로 5월 초순경 가지 끝에 3∼6개씩 모여 원뿔 모양의 꽃이 핀다. 꽃은 초록 잎과 같이 피는데, 눈부시게 하얗다. 다섯 장의 꽃잎은 사이가 조금씩 벌어져 있으며 매끈하고 정연한 것이 아니라 주름이 져 있다. 전체적으로 꽃은 청순하고 깔끔한 맛이 나며 한꺼번에 집단으로 피어 있을 때는 초록 캠퍼스에 흰 물감을 뿌려둔 것 같아 아름다움을 더한다.
가침 박달나무는 북경 만주 한반도 북부에 주로 자생한다.
자생지 주로 우리나라 강원도 이북 지방에 자생하며 중부 이남의 자생지로는 전남 우이도, 경북 문암산, 충북 청주 등이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외에 중국 동북 지방에도 자생한다
상(商)나라는 하(夏)나라를 멸망시켰고, 주(周)나라에 망했다. 선(單) 내용에 있는 정 여공이 약(櫟)땅을 지키는 단백(檀伯=단족 수장)을 약(櫟)나라 사람 도움으로 처 죽인 맹진(孟津) 부근 역시 옛 상(商)나라 영역에 있었고, 정 여공(鄭 厲公)은 주(周)나라 후손으로, 중국이 예濊 동이 + 맥貊 북적 상(商)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周)나라 주 문왕(周 文王) 적장자인 백읍 고는 주(周)나라 주 문왕(周 文王)이 상나라 제신에 의해 유리성에 갇혔을 때 제신에 의해 사망했고, 주 문왕(周 文王)의 아버지 계력은 융족을 예도(翳徒)에서 격퇴하고 세 명의 장수를 사로잡았으며 상나라 왕 문정에게 승리를 보고하였다. 그러나 주(周)나라 세력이 커지는 것을 걱정하던 문정은 계력에게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 많은 보물을 하사하였고 새고(塞庫)로 그를 보냈다. 그 후 문정은 계력을 새고에 감금해 죽였다고 죽서기년에 기록돼있다. 상나라는 주(周)나라 혈족에게 원수나 다름없다.
단군(檀君)은 단국(檀國) 임금이란 뜻이고 단국(檀國), 나라가 망하면, 왕실 대종 성(姓)은 국명을 씨(氏)로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前)단군조선(檀君朝鮮)은 중국 대륙에 하나라 관점에서, BC2333~BC1122년 북적+동이 지역에 존재했을 가능성 있고,
태산 아래, 대하구문화(大汶口文化)에 있던 동이족은 북적 상(商)나라와 연계, 상(商)나라 탕왕이 하나라를 칠 때 함께 했고, 동이 예족 주류는 요하와 한반도로 이동 선주민이 됐는데, 북적 맥족 상(商)나라가 망하고 상왕족 기자가 요하로 이동했을 때, 예족 단군은 수도를 만주로 이전, 기자조선(箕子朝鮮)과 연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맥(濊貊)에서 맥貊북방종족, 예濊흐릴, 글자에서 2가지 다른 지역 혈족이 함께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성씨姓氏 시스템은 항상 50% 부계 성姓 혈통이 모母 혈통 다른 서자가 50% 자기 혈족血族을 이끌고 같은 지붕宀아래 함께 살던 가족家族을 떠나 새 지역에 정착 씨氏로 불리면서 새 성姓을 창성創姓하는 과정인 것을, 다양성 확보하지 못하면 유전자 면역체계 약해지기 때문에, 성씨 글자가 많아진 상황에서, 같은 혈족血族 끼리 금혼하기 위해서 분파로 구분, 성씨姓氏를 바꾸지 않게 된 현대인들은 글자가 다르면 다른 혈족으로 착각, 성씨姓氏와 국명國名 변화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혈족血族은 부모父母가 100% 같은 형제 자매고, 가족家族은 같은 아버지父 50% + 다른 어머니母 = 가家, 면宀집, 시豕돼지, 집안에 돼지 키우는 민족이 우리 뿐이라 상나라 갑골문자와 한자가 우리 글이고도 합니다. 한지붕 아래서 돼지 키우며 먹고 사는 것이 가家, 한지붕 아래서 함께 먹고 사는 50%만 혈족이다. 1부 1처제 대한민국이라 1부 다처제 이해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설명합니다.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가족을 떠나 자기 혈족血族 3,000명을 이끌고, 단檀박달나무가 많은 지역에 사는 호족豪族 만나면서 환웅의 딸을 시집 보내면서 연합 단국檀國을 세웠고, 단군檀君이 시작됐는데, 환웅은 맥족으로 보이고, 사위는 예족으로 요하에 남았거나 요하로 돌아가면서 외손주가 예족 단군檀君을 이었고, 환국에서 환웅과 함께 온 맥족 북적은 세를 확장 하나라를 치고 상나라를 세웠습니다.
호족豪族 = 성姓은 여女계집 + 생生날, 어머니가 자녀를 출산하는 모양을 표현한 글자로, 사냥 채집하던 구석기 시대엔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배웠기에, 어떤 여자의 자녀들로 불리던 모계 사회였다. 농경정착하는 신석기 시대가 되면서, 농작물을 외침으로부터 지키는 아버지가 혈족의 중심이 되면서, 많은 농작물을 소유한 남자는 많은 부인을 둘 수 있었고, 토끼 보다 빠른 번식으로 그 지역을 평정한 최강 혈족血族을 호족이라 한다. 첫번째 부인을 적처嫡妻 큰 아들을 적장자嫡長子라 하고, 많은 부인들 후처後妻 아들은 수많은 아들 중에 하나란 뜻인 서자庶子로 구분했고, 전쟁에서 잡아 온 노예로부터 얻은 아들은 사람과 구분 얼자孼子로 불렀다.
유전자 이동 경로를 보면, 현재 한국에 사는 유전자 O, C, N 중국에 함께 있었고, 홍산문화 유적지 고인골이 Q유전자가 발견된다는 점에서, 한반도와 일본 공통 유전자 O가 예족이라면, 맥족은 N, C, Q, 셋중에 하나, Q는 현재 한국인엔 극히 일부만 존재하지만 사람은 오래 교류하면 섞이고 유전자 속에 흔적 남게 됩니다.
한국에 있는 부계 Y유전자는 O N C 유전자가 대부분이고, O유전자가 가장 많다.
맥족 상나라 고인골이 Q라고 주장하는 것도 봤지만, Q는 보다시피 중앙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건너갔고, 그쪽 문명이 BC6000~BC3000까지 아메리카 인디언 흔적있기 때문에, BC2333~BC1600년 이전에 이미 주류 세력이 지나가면서 일부 남아있던 사람들중 일부, 주류는 아닙니다. N과 C 둘 중에 하나가 맥족일텐데, 홍산문화 유적 고인골 35%가 N, 맥족은 N일 가능성 높습니다. 한국에 N은 주로 제주도에서 나타나죠? C는 경상도로 기원 전후 유입된 것으로 보이고, O1b2-M176은 황하 하류 지역 북경 요하 한반도 일본에 주로 분포하기 때문에, 단군 예족은 O-M176으로 생각되고, 한국과 일본인은 단군 후손 형제인 셈이죠. O-M176이 한국인 유전자 가장 큰 비중이지만 40%도 안되죠? 게다가 O1b2는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O2와 같은 뿌리, 사촌 형제인 셈이고 O2계열 전부 합치면 O1b2보다 결코 적지 않습니다. O유전자에서 갈라져 황하 하류 바닷가 지역에 살던 것이 O1b2, 북쪽으로 진출했던 N중 일부가 남하한 것이 환인 맥족이고, 한국과 일본인 중국인 공통 유전자인 O유전자 뿌리가 N이란 점에서, 한중일 생김새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푸틴도 가끔 생김새가 유럽인들 하곤 뭔가 느낌이 다르더군요. 만주 지역은 N C O 유전자와 Q 일부가 BC2000년 쯤엔 공존했을 겁니다.
이런 유전자 이동은 5,000년 이전 역사부터 공존했기 때문에, 한중일을 다른 존재로 구분할 필요 없는 고대사 N성姓 한가족이지만, 굳이 N O1 O2 씨氏 혈족을 나눈다면, 중국과 한국 구분은 예족과 맥족이 태행산맥 요하 상류 홍산문화 단檀박달나무가 많은 지역에서 만난 BC2333년부터고, 예맥족 중에서 맥족이 세운 상나라가 중국을 500년 동안 통치했다는 점에서, 또, 이후 많은 북방계 씨족들이 중국을 통치했다는 점에서, 이후 역사는 친척인 가족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족끼리 싸우지 말고 잘 지내야 합니다.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예맥이 예와 맥으로 구분되지만 서로 다른 계통이 아닌 하나의 계통(系統)이며, 다만 세부적으로 갈라진 갈래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예와 맥은 사회적·정치적으로 서로 구분이 되지만 종족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예맥 내부의 여러 집단들의 경쟁 속에서 우세한 집단이 주변 세력을 병합하면서 점차 세를 키워나갔는데, 단군신화에 전해지는 설화처럼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이 곰을 토템(totem)으로 하는 맥족(貊族)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예족(濊族)을 평정하고 복속시켜 고조선을 구성하는 종족집단을 이루었고, 이후 대표적인 예맥족인 부여로 그 세력이 계승되어 한반도 중남부에 거주했던 토착민과 더불어 한민족 형성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는 견해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
- 중국의 능순성(凌純聲)도 예는 예수(濊水)지역에 거주했던 맥족이라고 하여 정약용과 동일하게 이해하였다.
- 예일부(芮逸夫)는 한민족을 예맥과 한(韓)의 양 계통으로 구성되었다면서, 예맥족 중 예족은 한반도 중북부와 송화강·길림·눈강(嫩江)지역 등에 살았고, 맥족은 산동·요동·발해만 연안 등에 거주했으며, 거주지역에 따라 예와 맥이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북방 종족이라는 것은 틀림 없죠?
전 조선 = 상(商)나라 + 단군조선(檀君朝鮮) 으로 생각되고, 상나라 왕실 성씨 득성조인 자설(子契),
"설(契, 卨)은 상나라의 시조로 여겨지는 전설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자설(子契)이라고도 한다. 사마천 사기에 의하면 유융씨(有娀氏)의 딸이자 제곡의 차비인 간적이 수영을 하고 있을 때, 제비의 알을 먹어서 태어났다. 또 요의 시대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설은 성인이 된 후에 우의 황하 치수를 도왔다. 순은 설의 업적을 평가해 사도(司徒)로 임명하고 상(商)에 봉하였으며 자(子)라는 성을 주었다. 다만 시경에는 요가 상에 봉했다고 쓰여져 있다."
여기서, 설(契)은 사람 이름이 아닌, 혈족 성씨로 생각되고, 설(契)씨 뿌리는 바이칼호 아래 설련하에 뿌리가 있습니다.
셀렝가 강(偰輦河, 러시아어: Селенга) 또는 셀렝게 강(몽골어: Сэлэнгэ мөрөн)은 몽골과 러시아를 흘러가는 강이다. 항가이 산맥(몽골)에서 발원해서 바이칼 호로 흘러 들어간다. 유역 길이는 1024 km이다. 셀렝가 강은 예니세이 강-안가라 강 연결 지역에 있다.
한국 역사에서 경주 설씨의 시조 설문질(偰文質), 덕수 장씨 시조 장순룡(張舜龍), 임천 이씨 시조 이현(李玄) 등이 셀렝가 강 근처에서 나고 자랐다고 전해진다. 셀렌가 강의 한자 표기인 설연하강(偰輦河江 또는 薛延河江)에서 경주 설씨가 유래하였다.
설씨 뿌리가 바이칼호 아래에 있는 것에서, 상나라 시조 자설 역시 북방 계통일 가능성 높고, 후손인 탕왕의 근거지 산동성 태산 동이까지 이동하는 경로에 홍산문화(红山文化) 유적지가 있습니다.
바이칼호에서 요하 홍산문화 유적지까지 이동하는 과정을 구석기 시대 환인(桓因) 환국 시대로 추정되고, 신석기시대 밭농사 홍산문화 유적지에 정착하는 과정이 BC2333년 단군(檀君) 단국(檀國) 시작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신단수 태백산은 홍산문화 유적지 태행산맥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 높고, 요하에서 정착 밭농사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일부가 산동성 태산 지역으로 남하, 탕왕이 태산 지역을 기반으로 서쪽 하나라를 정벌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나라가 동이를 지칭하던 주검 시(尸)는 자신들이 출발한 옛 지역이란 뜻으로 추정되고, 상나라가 망하고 왕족 기자 서여가 요하로 도망간 것을, 본향으로 돌아갔다 표현하는 중국 학자도 있습니다. 상나라 + 단군 = 같은 계통일 가능성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하(夏)나라 역대 수도 지역 분포와 이민족 위치
하(夏)나라 역대 수도 위치를 요약하면, 황하 중류 지역과 북쪽으로 올라가는 황하 본류 오른쪽 황하 지류에 분포한, 한반도 크기 정도 범위다.
집 모양으로 표시한 곳이 역대 하(夏)나라 수도 위치로, 한반도 크기와 비슷하고, 중심에 용산문화(龍山 文化) 유적지가 있는데, 황하 본류가 북상하는 오른쪽 황하 지류에 걸쳐 하나라 역대 수도 위치가 분포해있다.
상(商)나라가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상(商)나라 탕왕의 첫 수도 상구는 현재 상추시로, 주(周)나라 무왕 희발이 역성혁명 후, 상(商)나라 태자 녹보 무경에게 상(商)나라를 맡길 때, 감시자로 붙였던 세째 동생 관숙 희선을 감시자로 분봉했던 관나라가 있던 지역이고, 넷째 주공 단이 삼감의난 반란 평정후,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상나라 왕족 미자 계를 분봉 송나라를 세웠던 지역이다.
전(前)단군조선(檀君朝鮮) 북적과 동이는 하(夏)나라중심 중국 입장에서 볼 땐 북쪽 맥족(貊族)과 동쪽 예족(濊族)으로 구분하겠지만, 상(商)나라 땐 같은 테두리 안에 있었고, 용산문화(龍山文化)가 황하 중류 지역에 있던 하나라 문화, 북적족 맥족(貊族)으로 보이는 상(商)나라는 요하문명(紅山文化)에 뿌리가 있고, 동이 예족(濊族)은 태산(泰山)아래, 고구려 3족오와 연결 고리가 있는, 다리 3개 토기 쓰던 대하구문화(大汶口文化)에 뿌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주(周)나라 반란을 계기로 2 + 1 = 3 계통이 만주(滿洲) 지역에서 혼합되면서 후(後)단군조선(檀君朝鮮)을 구성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周)나라는 황하 북쪽 서쪽 지역인 오르도스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 유목민 침입에 농작물을 빼앗겼고, 2개의 큰 강을 건너 장안성 서북쪽 기산으로 도망, 정착한 후 상나라 서쪽에 있는 제후국 공후백 3단계 관작(官爵)중에서 말단 백 관작(官爵)을 받았고, 서백 희창으로 불렸다. 하나라 관작(官爵)은 5단계 공후백자남, 상나라는 3단계 공작 후작 백작, 주(周)나라 때 다시 5단계 공후백자남으로 복원 됐다. 여기서 상나라 관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계급이라기 보단, 다스리는 족읍族邑 크기로 생각되고, 희창의 주족周族은 인구 15만 규모 작은 혈족이다.
하나라 수도가 있던 지역중에서 가장 북쪽 황하 지류인 진양은 상나라가 망할 때는 북적족 지역으로 태원 선우씨가 본관으로 알려져 있고, 지명에 태원이 있고, 선우씨는 기자 동생이 우산국에 분봉되면서, 조선+우산국=선우씨가 됐다고 한다. 상나라가 망하면서 동쪽에 있던 기자 일족이 이동할 때 함께 이동한 것으로 보이고, 옛날엔 피임도 없고, 왕족은 후처가 많기 때문에 토끼보다 번식이 빠르므로, 씨족 국가를 형성하는 것은 순간이다. 기자는 상나라 마지막 30대 제신 주왕의 할아버지인 28대 왕 문정의 세 아들로 기록돼있고, 29대 왕 제을, 비간 기자 3형제로 기록돼있는데, 아마도 본처 형제들만 기록했을 가능성 높은, 인접해있던 태원 선우씨가 동생이라면, 배 다른 동생이거나, 먼 친척 동생일 가능성 있습니다. 주(周)나라 주 문왕(周 文王) 아들도 18명으로 기록돼있는데, 소공석은 본처 10명에도, 후처 서자에도 없는데, 주 무왕(周 武王) 동생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먼 친척일 가능성 높은, 주(周)나라가 상나라를 멸했을 때, 주(周)나라 인구는 15만명 정도라 합니다.
후(後)단군조선(檀君朝鮮)은 주(周)나라 반란으로 상(商)나라가 망하면서 상(商)나라 왕족인 기자 서여는 BC1122년 백적족 지역에서 기(箕)족을 이끌고 평양(平壤)=양평(壤平) 요하로 이동했습니다. BC1122년~BC1046년 주(周)나라 주공 단은 삼감의 난 평정 후 상(商)나라 유민 중국 각지에 분할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 실행했고, 상(商)나라 왕족 기자 일족이 먼저 이동한 요하로 800여 성씨 많은 유입 발생하면서 세력이 커졌습니다.
800여 많은 성씨가 이주한 이유는, 상(商)나라는 중원을 통치 할 때, 주(周)나라 혈족 수장인 주 문왕(周 文王)을 잡아 온 것을 참고하면, 다른 혈족에 자기 혈족을 낙하산 왕으로 분봉하지 않았는데, 주(周)나라는 희성 성씨 자기 친족을 다른 혈족 지역에 왕으로 분봉했습니다. 자기 핏줄이 직접 통치 하는 것과 느낌이 완전히 다르죠? 이주 할 이유가 됩니다.
주(周)나라는 삼감의 난, 상(商)나라 반란 겪은 후라, 주공 단(周公 旦)은 동생들 중, 젊은 강(康)나라 후(侯) 희(姬) 봉(封)을 위(衛)나라 후(侯)로 봉하면서, 주공 단(周公 旦)은 강고(康誥)=동생 강(康姓)에게 조언한다. 상(商)나라 유민 반란 감시 당부했고, 위 강숙(衛 康叔)은 둘째 아들을 감시자로 요하 기자(箕子)가 있는 지역에 분봉했고, 기자(箕子)는 건국 공신으로 대했고 신천강씨(信川康氏) 득성조가 됐습니다.
그로부터 500년 이상 경과한 후, BC600년 경 강국(康國)중앙아시아 월지(月氏,月支) 유목 지역에서 확장 또는 상업 교류로 확장 영향 받은 것이 부여(扶餘) 전신인 고리국(槀離國)으로, 강국(康國) 왕실 성(姓)은 온(溫)으로, 온조(溫祚), 온달(溫達), 온군해(溫君解) 성씨(姓氏)로 한반도에 나타납니다.
부여(扶餘)는 BC500년 경 쑹화강(松花江송화강) 유역에서 시작된 고리국(槀離國)에 연결고리가 있고, BC300년~BC249년 연나라 진개 요하 침공~BC194년 위만 반란 기자조선이 망할 시기에 시작됩니다.
상(商)나라 왕실 성(姓)은 자(子) 왕족인 것을 표시하는 성씨(姓氏) 기자(箕子), 이름 서여(胥餘)와 부여(扶餘), 여(餘)는 우연히 쓴 이름일까요? 부(扶)도울, 받칠, 부여(扶餘)는 여(餘)를 부(扶) 돕고 받친다는 뜻입니다. 은력(殷曆=상(商)나라 달력)을 그 시기에 부여(扶餘)가 사용한 것도 우연일까요?
부여(扶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자(箕子) 서여(胥餘)를 돕고 받친다는 뜻인데, 현재 한국인 대다수는 부여(扶餘) 계통으로, 기자(箕子)와 함께 온 상(商)나라 유민은 절대 다수가 아니지만 후손 유전자 비중 낮지 않습니다. 기자(箕子)는 북적족 지역에 있던 혈족으로, 그 이전 산동성 지역에 있던 동이족이 상(商)나라가 망하기 이전에 먼저 선주 했기 때문에, 상(商)나라 왕족인 기자(箕子)가 요하에 도착했을 때 수도를 장단경, 백두산 아래 길림성으로 이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백두산 천지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강 있고, 헤이룽장성 송화강까지 연결됩니다. 단군조선은 이곳으로 BC1122년 수도를 이전 서쪽 요하 기자와 연대 후조선을 형성했고, 요하에 머물러 있는 기자 조선과 달리 세력을 확장, BC600년 만주 지역 서쪽 월지국과 폭 넓은 교류했기 때문에, 기자조선 후예들이 BC300년 이후 연나라에 밀려 한반도로 내려가 단절 됐을 때, 북방 계통 + 상나라 문명 = 강한 단군 부여를 형성할 수 있었다 생각됩니다. 여(餘)를 돕는 다는 것은 연나라로 인해 단절된 예+맥, 기자와 연대를 지속한다 의미하는 것입니다.
위만조선(衛滿朝鮮) 왕 위만(衛滿)은 주(周)나라 위 강숙(衛 康叔) 후손 중국인인 것을 희성위씨(姬姓衞氏) 성씨(姓氏)에서 알 수 있다. 한국사에 어울리지 않는 왕조다. 위 강숙(衛 康叔)은 희성위씨(姬姓衞氏)와 희성강씨(姬姓康氏) 2개 성씨 뿌리가 된다.
후(後) 조선(朝鮮)이 위만에게 망한 이후 부여(扶餘) 대소왕 동생이 압록강 근처에 갈사부여(曷思夫餘)=갈사국(曷思國) 을 세웠고, 그 후손 갈족(羯族), 말갈(靺鞨)은 진양에 5호16국 시대 석(石)씨 후조(後趙)를 세웠고, 5호는 턱밑에 까지 이민족이 진출했다는 뜻이다. 유연이 세운 조를 전조라 하는데, 나중에 세운 송나라 조송, 조씨가 후조 후손인지 전조 후손인진 알 수 없다. 후조 후손이라면 갈사부여와 혈연적 상관 관계가 있을 수 있다.
부여(扶餘)에서 파생된 성씨(姓氏)는 후조 석씨도 있고, 강국(康國)소무구성(昭武九姓)엔 강(康), 사(史), 안(安), 조(曹), 석(石), 미(米), 하(何), 화심(火寻), 무지(戊地) 온(溫)씨가 있다. 왕실 성(姓)은 온(溫)이고, 강(康)은 나라가 망하면 왕실 성을 국명 씨(氏)로 바꾸는 경우가 많다. 소무성은 강국이 돌궐(突厥)에 밀려 간 중국 서쪽지역에 있다.
월지국 활동 반경이 히말라야 아래 이 지역을 기본으로 하고 있고, 왼쪽에 타지키스탄 소무구성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이 있고, 오른쪽 지역에 중국이 말하는 소무성이 있다. 월지국 성씨들이 어떻게 동쪽 만주까지 진출했다 다시 돌궐에 밀려왔는지 과정을 설명하긴 어렵지만, 성씨는 연결 고리가 있다.
소무구성 왕실 성씨인 온(溫)은 부여계 성씨로 생각되고, 백제 온조(溫祚) 신라 온군해(溫君解) 고구려 온달(溫達) 삼국시대 주요 인물이 있다. 주몽의 왕비 소서노(召西奴)는 첫 번째 남편 : 우태(優台) (동부여(東夫餘) 해부루왕(解夫婁王 서손)와 사이에서 비류(沸流) 온조(溫祚) 의 어머니다.
백제 온조 미추홀에 세운 백제로 성장한 십제를 남부여(扶餘)로도 부르죠? 백제 마지막 왕자가 당나라에 끌려가서 부여(扶餘)씨, 여餘에서 여余나 글자만 따서, 서徐씨로 바꾼 것이 부여 서씨입니다.
부여 서씨(扶餘 徐氏)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그는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패하면서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에 압송되었는데, 당 고종이 본래의 성씨인 ‘부여(扶餘)’를 ‘서(徐)’씨로 바꾸고 웅진도독으로 삼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성씨와 국가 혈족 흐름을 찾다보면 항상, 성 뿌리가 같은 혈족은 씨로 바뀔 때 공통글자를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천 서徐씨가 기자 서여 후손이란 주장도 있는데, 시조 연대를 고려하면, 부여 서씨가 먼저, 이천 서씨 시조가 나중에 생긴 것을 고려하면, 부여 서씨 분파로 파생된 것으로 생각되고, 어차피 예맥족 같기 때문에, 단군후손이라 주장하는 것이나, 기자 후손이라 주장하는 것이나, 홍산문화 지역에서 만난 때부터 함께 했기 때문에, 같은 주장하는 겁니다.
춘추시대 송나라 송씨 성씨 계보는 자-미-송이 되는데, 역사를 보면, 공씨 대씨와 강씨도 존재할 수 있는, 자성송씨다. 북송 왕실 성은 조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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